국내에서 개별 종교를 넘어 일반 종교학의 시대를 본격적으로 연 정진홍(鄭鎭弘·65)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가 내년 2월 정년 퇴임에 앞서 10일 서울대 문화관에서 ‘종교와 종교학’이란 주제로 고별강연을 했다.
강연 요지는 기독교 유교 불교 이슬람교 등이 서로 경쟁하던 시대(종교의 시대)는 가고, 또 공존을 모색하던 종교다원주의의 시대(종교들의 시대)도 가고, 이제 종교적 정치와 종교적 경제, 종교적 예술을 언급해야 하는 시대(종교적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것. 고별 강연에 앞두고 짐을 정리하고 있는 정교수를 연구실에서 만났다.
-종교학적 관점은 오늘날 어디에 쓸모가 있을까요.
“현대 사회에서 가장 합리적인 분야로 여겨지는 정치와 경제가 종교화하는 경우를 봅니다. 합리적인 지성 대신에 맹목적인 응집이나 충성이 요구되고 교조적인 카리스마나 독트린이 중시되기도 합니다. 이런 현상은 ‘종교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 가장 잘 설명할 수 있고 그 결과도 예측할 수 있습니다.월드컵때 ‘붉은 악마’ 현상에도 종교 집단의 광기같은 것이 포함돼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 어떤 의도를 자극을 주면 폭발할 것 같은 그런 것이죠. ”
-요즘 신세대들도 종교학에 관심을 갖나요.
“15년 전 손을 뗐던 ‘종교학 개론’ 강의를 작년부터 다시 맡았습니다. 과거 386세대들은 열렬한 운동권 학생과 광적인 신앙인이 서로 추구하는 방향은 정반대였지만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동일한 정신구조(mentality)를 갖고 있었습니다. 신세대 학생에게는 첫 강의시간에 ‘우리는 행복한가’라는 질문을 던져봤습니다. 개인적이고 재미만 추구한다고 여겼던 신세대 학생들이 이 질문을 의외로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본인에게 성(聖)스러운 것은 무엇입니까.
“성(聖)은 물건처럼 실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과 속(俗)은 의식의 현상입니다. 가령 십자가는 기독교인에게는 성스러운 것이지만 비기독교인에게는 나무 토막에 불과합니다. 성과 속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것을 성으로 승인할 때 성스러운 것이 되는 겁니다. 종교학에서는 종교인이 자기 경험을 얘기하는 것을 존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미신과 신앙은 어떻게 구별하나요.
“미신은 ‘편리한 환상’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지성이 끝나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성과 감성을 모두 갖고 삶 전체가 의미있는 것이라고 인정하는 뭔가에서 시작됩니다.”
정 교수는 신앙을 ‘눈뜬 꿈’, 미신을 ‘눈감은 꿈’에 비유했다. 사실 정 교수는 종교학계의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독창적이면서도 적확한 언어를 구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학문과 언어는 어떤 관계에 있나요.
“학문은 언어에 담길 수 밖에 없습니다. 학문은 몸짓으로 하는 게 아니잖아요. 저는 젊은 세대들에게 늘 ‘위대한 학자의 언어를 맹목적으로 답습하지 마라’ ‘네 자신의 언어로 네 자신의 생각을 소통가능하게 하라’고 말합니다. 종교의 시대에 사용하던 언어와 종교들의 시대에 사용하던 언어가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또 종교적 시대에는 어떤 언어를 사용해야 소통이 가능한지를 궁리해야 합니다. 학문의 발전은 새로운 언어의 탄생입니다. 언어가 변하지 않고는 새로운 인식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4·19세대 교수로 갖는 특별한 소회는 없나요.
“내년 2월 퇴임하는 교수들은 대개 56년 학번이니까 대학 재학 중 군대에 가지 않았다면 60년 2월 졸업 직후에 4·19를 맞게 됩니다. 저는 졸업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군대에 갖고 아이러니하게도 5·16때 혁명군의 일원이 됐습니다. 4·19세대가 하나로 규정될만큼 뚜렷한 아이덴티티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정말 결정적인(critical) 사건일수록 개인의 경험방식은 더욱 다양해지는 법입니다.”
정 교수는 37년 충남 공주 출생으로 서울대 종교학을 나왔다. 미국 유니언신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 샌프란시스코신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후 덕성여대 명지대 교수를 거쳐 82년부터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로 재직해왔다. 주요 저서로는 ‘종교학 서설’ ‘종교문화의 논리’ 등이 있다.
송평인기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