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기자 구세군 자선냄비 자원봉사 체험해보니…

  • 입력 2002년 12월 13일 18시 23분


구세군 사관과 자원봉사자들이 모금한 돈을 정리하고 있다./박영대기자
구세군 사관과 자원봉사자들이 모금한 돈을 정리하고 있다./박영대기자
“팔로 하지 말고 손목 관절을 움직이세요.”

옆에 서 있던 김재득 구세군 사관 후보생(48)이 종소리가 영 시원치 않다는 표정으로 한마디한다. 종소리를 뎅그렁 뎅그렁 울려 퍼지게 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딱’ ‘딱’ 하는 둔탁한 소리가 나기 일쑤다.

매서운 강추위가 전국을 강타한 10일 오후 2시경. 기자는 서울 중구 명동 롯데백화점 앞 구세군 자선냄비 앞에서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자선을 청했다. 손수건으로 마이크를 감싸쥐고 쉼 없이 외치는 김씨 옆에서 종을 흔들고 돈을 넣는 시민들에게 “감사합니다”를 말하는 일에 불과했지만 쉽지 않았다. 찬바람이 얼굴을 때려 얼어붙는 것 같았고 손발이 시렸다.

돈을 넣는 시민들은 다양했다. 양손에 든 무거운 쇼핑백을 굳이 내려놓고 지갑에서 돈을 꺼내는 주부, 버스나 택시를 기다리다 생각났다는 듯 다가오는 중년 남자, 엄마 손을 잡고 동전을 집어넣는 아이들부터 다정하게 손을 잡은 연인들도 있었다.

성금은 대부분 1000원에서 5000원 사이였지만 간간이 만원짜리도 눈에 띄었다. 직업적 호기심에 그들에게 다가가 인터뷰를 하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모두들 너무 부끄러워했다. 작은 돈을 넣은 것뿐인데 신문에 날 일이 아니라고 얼굴이 빨개져서 도망쳤다.

1시간 단위로 바뀌는 교대조가 왔다. “몸이나 녹이자”며 김씨가 기자를 데리고 인근 골목에 세워져 있는 승합차로 갔다. 쉴 곳이 따로 없어 임시로 차를 이용한다고 했다. 그가 휴대용 버너에 불을 붙이고 찌그러진 주전자를 올리자 훈기가 금방 전해져 온다.

“어떻게 구세군이 되셨어요?”

“사서 고생한다”고 기자에게 커피를 건네는 그에게 대뜸 이렇게 물었다. 사람 좋게 생긴 그는 만면에 웃음을 띤 채 이렇게 말했다.

“대기업체 다니다, 작년에 구세군 사관학교에 들어갔어요. 30명 동기생들 중 제가 제일 나이가 많습니다. 어릴 때부터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는데 집안 어른 중 한 분이 구세군이셔서 영향을 받았지요. 삶의 안락을 포기하는 데 고민이 많았지만 나머지 생을 하나님을 위해 값있게 쓰기로 결정했습니다.”

1865년 영국 목사 윌리엄 부스가 창시한 구세군은 당시만 해도 귀족종교였던 기독교의 민중화를 들고 나와 주로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복음을 전했다. 우리나라에는 개신교의 한 교단으로 1908년 도입됐다. 구세군의 특징은 독특한 사관학교 제도. 전 세계 108개국 구세군들은 신학교와 비교할 수 있는 2년 과정의 사관학교(사관후보생·한국은 경기 과천시 중앙동 소재)를 졸업해야 사관(목사)으로 임관된다. 임관 후에는 전국 250개 교회 혹은 사회사업시설로 배치되거나 서울 종로구 신문로 1가 구세군대한본영에서 일한다.

특별히 까다로운 계율은 없지만, 결혼을 하려면 반드시 구세군 커플이어야 한다. 김씨 역시 부인이 구세군 사관후보생이다.“결혼 후 부부가 함께 구세군이 된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요.”

“물론이죠. 하지만 아내도 독실한 기독교인이어서 다른 삶을 살겠다는 제 뜻을 잘 따라 주었습니다.”

30여분쯤 지났을까, 3명의 여자 구세군들이 차안으로 들어왔다. 역시 명동 일대에서 일하고 있는 분들이다. 차안이 웃음소리와 수다로 갑자기 밝아졌다.

“명동은 자선냄비가 처음(74년) 걸린 곳이에요. 역사가 길다보니 단골들이 많아요. 매년 적금을 부어 내는 분도 있어요. 아이들이 저금통을 통째로 갖고 오는 경우도 있고요.”

“뭉칫돈이 가장 많이 터지는 곳도 명동이에요. 그저껜 평범한 옷차림의 노부부 한 쌍이 냄비 앞으로 오시더니 할머니가 할아버지 배낭을 열어 100만원짜리 수표를 내셨어요.”

“남을 돕고 싶으면 생색내면서 할 수 있는 곳이 많은데 자선냄비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한다는 기독교적 실천입니다. 20일이라는 긴 기간에 자원봉사자들까지 합쳐 총 3만여명이 전국에서 돈을 모으는 노력에 비하면 한해 모금액 20여억원은 어쩌면 작은 돈입니다. 하지만 구세군 자선냄비는 돈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종소리를 듣는 사람들이 ‘아! 이 추운 계절에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이 있겠구나’ 하는 것을 생각케 하는 일종의 정신운동이지요.”

다시 백화점 앞으로 돌아왔다. 갈수록 기온은 더 떨어졌다. 어둠이 내리자 거리에 사람들은 더 늘어났고 성금도 많아졌다. 김씨는 “살기 힘들 때일수록 성금액이 는다”며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어려운 사람을 더 잘 돕는다”고 전했다.

저녁 6시 무렵엔 대학생 자원봉사자 한 사람이 합류했다. 지난 3년간 매년 봉사를 해 왔는데 내년엔 군에 갈 것 같아서 올해엔 아르바이트까지 줄이고 봉사한다고 했다.

시민들이 돈을 낼 때마다 밝게 웃으면서 머리가 발끝에 닿을 정도로 꾸벅꾸벅 인사를 하는 그가 정말 대견해 보였다.

“컴퓨터 게임이나 여자친구랑 영화 보는 것도 재미있지만 자선냄비 봉사를 하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어요. 남을 돕는 일은 정말 재미있는 일이어서 하는 거예요.”

명동의 밤거리가 자선냄비 종소리와 함께 깊어가고 있었다.

(봉사 문의 02-720-8250, www.salvationarmy.or.kr/div)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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