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태평소를 불었던 김관섭 아저씨(1980년경 작고)는 나의 우상이었다. 그는 종종 저녁 노을 지는 둑에서 태평소를 불었다. 구슬프고 가냘픈 소리는 듣는 이의 애간장을 녹이곤 했다. 농악에서 두드러진 악기는 아니지만 태평소만의 흥겹고 아련한 소리는 너무도 매력적이었다.
열다섯 살 되던 1965년 서울에 올라온 나는 선린상고를 졸업한 뒤 군에 입대해 문선대에서 활동했다. 군 제대 후 작곡법 등을 배우며 가수의 꿈을 키워갔다. 그러나 무역업 카서비스센터 등 여러 번 직장을 옮겨다니는 동안 몸과 마음은 지쳐갔다. 그러던 어느 날 내 몸 어딘가에서 김관섭 아저씨의 태평소 연주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그리워졌다.
아마추어 국악단체인 ‘한소리회’에 들어갔고, 86년 대금의 명인인 원장현 선생을 만나 태평소를 배웠다.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짐을 느끼면서 미친 듯이 태평소에 몰입했다. 결국 92년 직장을 때려치우고 태평소 연주자로 살기로 결심했다. 93, 94년 전주 대사습놀이에 농악대원로 출전해 2년 연속 장원을 차지했다. 93년 말에는 ‘서태지와 아이들’ 라이브 공연에서 ‘하여가’의 태평소 연주를 맡기도 했다. 이처럼 김관섭 아저씨의 태평소 연주는 내 인생을 바꾼 실마리가 되었다. 혼돈의 시절에 태평소는 위안이 되었고, ‘가수 장사익’으로 일어서는 계기가 되었다. 비록 지금은 노래를 부르고 있지만 태평소 소리는 항상 내 가슴속에 살아 있다.
장사익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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