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1등이네요. 고속버스로 서울에서 오다 보니까 차가 밀려서 자가용 타고 오시는 분들은 고생깨나 하시겠던데요. 아마 그래서 다들 늦으시나 보다.”
이곳의 주인 이광득씨(43·남) 부부는 만두소를 빚던 장갑을 벗어놓으며 반갑게 인사한다.
이규원씨(37·남·경북 구미) 부부와 아이 둘, 김성미씨(29·경기 평택시)와 딸 정현이(4), 성미씨 친구와 두 딸, 안수자씨(37·경기 안산시)가 차례차례 모였으며 9시가 넘어서 마지막으로 손덕희씨(32·경기 의정부시) 부부와 아이 둘이 들어섰다.
곧 눈이라도 내릴 듯 을씨년스러운 날씨에 온기라고는 별로 없어 서 있기만 해도 발이 시린 이곳에 무슨 일이 있기에 스키 시즌 교통체증을 뚫고 먼 곳에서 사람들이 찾아온 것일까.
이들은 인터넷경매사이트 옥션의 ‘김치장인 산들바람님을 사랑하는 사람들(http://community.auction.co.kr/club.asp?cid=g0400005)’ 회원. 모임은 상인과 고객들이 음식을 통해 서로의 대소사를 챙기기 시작하면서 생겨난 국내최초의 ‘김치 커뮤니티’다. 진미식품, 제일제당의 김치사업부를 거친 이광득씨가 독립해서 자신이 담근 김치를 경매에 올리기 시작한 것이 6월. 모임은 8월말 결성됐으며 현재 회원은 90명. 이날은 모임 출범 100일을 기념해서 가진 두 번째 오프라인 모임이었다.
● 매주 채팅모임… 요리비법 나눠
오후 9시. 다섯시간 넘게 주물럭거려 완성한 만둣국에 굴 배추김치, 섞박지, 동치미를 앞에 두고 모두들 둘러섰다.
“여기 좀 봐주세요. 사진부터 찍고 드시지요.”
아무리 외쳐봐도 사람들은 떠들어대며 먹기에 바쁘다. 둥글넓적한 무로 만든 섞박지는 칼로 썰지 말고 베어먹어야 제맛이라며 누군가는 젓가락에 푹 꽂은 뒤 먹기 시작했고, 옆에서는 배추김치를 쭉 찢어 만두에 걸쳐 먹는다.
“처음에는 김치를 시댁에서 가져다 먹었죠. 부모님이 나이가 드시니까 여기저기서 사먹게 됐는데 우연히 옥션에서 ‘산.들.바람’김치 게시판을 보게 됐어요. 상품도 상품이지만 문의 게시판에 들어가 읽다가 ‘뒤집어졌죠’.”
손덕희씨가 푹 빠져버린 문의 게시판에는 이씨가 만든 김치에 대한 질문이 100∼130건 올라오는데 내용은 보통 다음과 같다.
‘안녕하세요…. 앞전에 갓김치 안 넣고 섞박지 넣으셨다고 무지 실망하던 소녀를 기억하시는지요…. 하루에 겨우 두끼, 것도 혼자서만 먹는 밥상에 9월부터 지금까지 (10㎏짜리) 김치를 4번 시켰으니 냉장고에 김치가 풍년 날 수밖에요…. 근데 님의 김치는 약을 타나봐요…. 중독돼 가고 있는 것 같아서….’(ID : jinny2003)
김치로 시작된 게시판은 삶의 지혜를 나누는 공간이 된다. 아줌마들이 대부분인 회원들이 주부 노하우를 공유한다. 누군가 된장 시래기를 어떻게 끓이느냐는 질문을 올리면 저마다의 요리법이 ‘리플’로 달린다. 회원들은 매주 목요일 오후 11시부터는 실시간 채팅모임도 갖는다.
“한국사람에게 가장 기본적인 먹을거리가 김치잖아요. 주부들이 모일 공간이 없는데 생활이야기와 음식이야기로 공감대를 나눌 수 있는 공간으로서 여기는 완벽한 거 같아요. 저는 게임사이트에서 ‘번개’모임을 한 적도 있는데 그냥 만나서 밥과 술을 먹는 게 고작이었죠.”(안수자씨)
전산 개발자로 이날의 유일한 남성 멤버인 이규원씨는 “전산업에 종사한지 20년 됐지만 인터넷 때문에 세상 망하겠다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이 커뮤니티로 가치관이 변했다. 처음에는 상품을 사지 않고 글만 한 달 넘게 읽다가 나중에는 김치도 많이 사게 됐다”고 말했다.
이씨는 상품을 ‘상장’시킬 때면 자신만의 독특한 글을 남긴다. 국내 최고의 재료를 썼고 어디에서 상을 받은 김치라는 일반적인 설명 대신 읽는 이의 감성을 자극한다.
‘얼마전 섞박지 김치를 만들었습니다. 기억나셔요? 김장김치를 담글 때 손바닥만한 무를 썸벙썸벙 잘라서 구석에 끼워두면 곰국이나 설렁탕 먹을 때 젓가락에 쿡 꿰어서 써벅써벅 베먹던 거 말입니다….(중략) 내일쯤에는 비가 올 것도 같다네요? 주말을 계획하고 계신 분들께는 죄송스럽지만, 시골은 가뭄이라 타는 목마름으로 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비 좀 오시라고 해주십시요.’
이런 소개글과 함께 이씨가 김치 10㎏을 담그는 데 든 실비용, 또는 최저가인 1000원 등을 붙여 놓으면 구매자들이 저마다 원하는 값과 필요한 수량을 써내 온라인경매가 진행된다. 가장 높은 비용을 먼저 제시한 사람의 순서대로 김치는 ‘낙찰’된다. 이씨가 한번에 담그는 김치는 최대 10㎏ 40세트. 경매에 참가했다가 떨어졌지만 ‘절절한’ 사연이 있어 따로 요청하는 구매자에게는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원하는 상품을 경매된 값에 보내기도 한다.
● ‘바람 김치’는 과연 특별한 맛이 있나
이광득씨의 김치 맛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이규원씨는 민물새우로 만든 토하김치 맛에 완전히 반했다. 경매에 붙여진 8세트 중에서 10㎏짜리 3세트를 사들였다. ‘김치를 왜 사다먹느냐’며 처음에 거들떠보지도 않던 어머니는 나중에는 “더 없느냐”고 아들에게 전화했을 정도.
이씨의 부인 신명희씨(41)는 ‘짜지도 싱겁지도 않으면서 간간하고 고소했던’ 깻잎 장아찌 맛을 잊지 못한다. 화통한 신씨는 이씨 김치가 옥션에 오를 때마다 사들이기 때문에 너무 많다 싶으면 동네 아줌마들에게 나눠준다. 그 맛에 반한 아줌마들과 함께 공동 구매를 하는 것도 최근의 재미. 자칭 ‘바람 김치 구미 지부장’이다.
그러나 홍윤희씨는 친정어머니의 김치 맛에는 이씨의 김치가 따라가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안수자씨는 “사먹는 김치 맛에는 크게 차이가 없다. 이 김치도 첫 맛은 다른 김치와 같다. 그러나 익을수록 제맛이 난다. 솔직히 값도 옥션 내 다른 김치보다는 비싼 편이다. 그런데 이 커뮤니티의 마력에 빠지면 한두 번 맛이 이상하거나 1000원, 2000원 비싼 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광득씨가 김치를 담그고 유통하는 데는 원칙이 있다.
예를 들어 7∼8월에는 배추김치 대신 무김치를 주로 담근다. 이 때의 배추는 다른 계절에 비해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많이 쳐서 길렀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 또 배추를 절이고 씻는 게 김치 맛의 첫걸음이다. 여름에는 17∼18% 농도의 소금물에 배추를 7∼8시간 담가야, 겨울에는 12∼14%의 소금물에 14∼18시간 담가야 김치가 제맛을 낸다고 본다.
김치의 맛을 결정짓는 양념은 직접 시골장을 돌아다니며 사온다. 안성장 무주장 진안장 영동장 등 인근 지역의 장치고 안 가 본 장이 없다. 자신의 비법을 맹신하지 않고 동네 어른이나 재래시장 상인에게 만드는 법을 반드시 물어온다. 이씨는 김치뿐만 아니라 간장게장, 장조림, 청국장, 된장시래기, 갈비찜, 표고버섯 장아찌 등 전통 반찬을 계속 개발 중이다. ‘원가’를 따지지 않고 계속 상품을 개발하는 것은 회원들의 맛에 대한 평가와 반응이 결국 자신의 자산이 되기 때문이다.
오로지 김치맛 때문에 커뮤니티가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커뮤니티는 처음 ‘윌리’라는 아이디를 쓰는 사람 덕분에 출발하게 됐다. 20대 후반의 고시준비생인 그 총각은 이광득씨가 힘들어할 때 전화를 걸어와 주소를 물은 뒤 나초칩과 소스를 보내왔다. 그렇게 진 빚을 이씨는 다른 사람에게 갚았다. 예를 들어 한 구매자의 남편이 10년 동안 투병중이라는 소식에 환자가 좋아한다는 간장게장을 만들어서 서울의 병원까지 갖다주었다. 김성미씨는 “이씨나 동료 회원에게 한두 번 (마음으로나 작은 물질로) 빚 안져본 사람이 없을 거다. 서로 진 이 빚의 힘으로 커뮤니티가 굴러간다”고 말했다.
무주〓하임숙기자 arteme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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