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에 만나는 시]김영재 '겨울 별사'

  • 입력 2002년 12월 27일 18시 20분


산장에 몇 달째 머물고 있다는 처자가, 까마중 같은 눈을 가진 그 아가씨가, 난생 처음 천왕봉에 오른, 수숫대 같은 젊은 시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매년 섣달그믐이면 산장에 올라와 연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고요.” 지리산 정상에서 새해 첫 일출을 보며 연을 띄우는 사람들. 그들이 날린 연은 가장 높이 떠올랐을 때, 줄을 끊어버리는 액막이연이었겠지요.

십수 년 전, 장터목산장에서 저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게도 꿈이 하나 생겼더랬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 날 산에 올라, 새해 첫날 산에서 내려오자! 하지만 그 꿈은 곧 잊혀지고 말았습니다. 내 삶에서 간절함이 부족했거나, 내 삶이 지나치게 번잡했을 것입니다. 김영재 시인이 최근에 묶어낸 시집 ‘겨울 별사’(책만드는집)를 읽는 동안, 불현듯 산정에서 날린다는 액막이연이 생각났습니다.

시집을 읽는 동안, 나는 줄곧 산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 시집은 한마디로 산시(山詩)입니다. 지리산 천왕봉에서부터 속리산, 삼도봉, 관악산에 이르기까지 시인이 자주 찾는 산에 대한 ‘밀애’와 깨달음의 기록입니다. ‘호프가 희망일 수 있다고 호프를 따르’다가도 술이 깨고 나면 ‘호프는 희망이 아니라 거품’일 뿐이라며 무기력해 하는 중년이 주말마다 산을 찾아갑니다.

등산은 곧 삶입니다. 산길에 들어서는 시인의 자세는 매우 겸허합니다. 정상을 바라보지 않는 대신 ‘땅 힘과 눈 맞추고 마음을 낮추고 쉼 없이’ 걷습니다. 묵묵히 걸으면서 ‘나’의 안팎을 새롭게 바라봅니다. 자신의 눈꺼풀이 세상에서 가장 무겁다는 사실이며, ‘욕심이 많아’ 산처럼 높은 곳으로도, 물처럼 낮은 곳으로도 흘러가지 못하는 자기 자신과 만납니다.

김영재 시인의 산시들은 시 ‘산을 내려오면서’에서 가장 높은 해발 고도를 보여줍니다. 시인은 산정에서 ‘절정의 그 기쁨이 헤어짐이란 것’을 알아버립니다. 그리하여 ‘영혼은 그대에게 맡기고 빈 몸만 내려옵니다’ ‘오르는 길 멀고 길지만 머무를 시간 너무 짧구나’(천왕봉)와 같은 각성도 마찬가지입니다.

등산은 삶이어서 ‘겨울 별사’의 산시들은 어느새 사랑의 시로 거듭납니다. 앞길을 가로막는 절벽에서 ‘쓰러져 기댈 수 있는 막막함’을 발견하는 시인은 마침내 ‘직벽’ 앞에서 어금니를 깨물며 한 발 내딛습니다. ‘나는 독한 마음으로/너의 전부를 통과한다/너와 나/하나가 되어/또 하나의 사랑이구나’(직벽). 앙버티고 서 있는 직벽을 넘어가는 모습을 보십시오. ‘너와 나’가 만나는 사랑의 변증법입니다. ‘나’의 ‘독한 마음’이 없었다면 ‘너의 전부’ 또한 전제되지 않습니다. 두 치열한 개별성(차이)이 만나 ‘또 하나의 사랑’이라는 새로운 차원의 개별성을 성취하고 있습니다.

산악인들이 자주 강조하거니와, 등산은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닙니다. 등산은 산정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등산은 하산에서 완성됩니다. 배낭을 내려놓고 등산화를 벗을 때 등산은 종료됩니다. 올해 말에도 배낭에다 액막이연을 넣고 산행을 준비하는 분들이 계실 테지요. 여전히 분주하기만 한 저는 산정에서 일출을 맞는 대신, 독서 등 아래 ‘겨울 별사’를 가만히 펼쳐놓으려 합니다. 그리하여 이젠 나와도 무관하지 않은 ‘세상에서 가장 빠른/잡을 수 없는 세월/하산 길’을 찬찬히 바라보고자 합니다.

이 문 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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