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거일
평범한 회사원 구보 씨의 2003년은 그리 밝지 않게 시작되었다. 새해 첫날 사장 댁에 인사 드리러 갔을 때부터 마음이 무거웠다. 사장이야 처음부터 그를 좋게 여긴 적이 없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젊은 직원들의 눈길과 태도가 지난해보다 한층 더 차가워진 것이 마음에 무겁게 얹혔다.
구보 씨는 가볼 데가 있다고 둘러대고서 자리에서 먼저 일어섰다. 아무도 그를 잡지 않았다. 여느 때보다 한산한 거리를 걸으면서, 그는 젊은이들을 눈여겨 보는 자신을 발견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40대 후반 많이 희어진 머리를 염색하기 시작한 뒤로, 그는 나이를 점차 깊이 의식하게 되었고, 회사 일에서나 우연한 모임에서나 자신의 의견을 덜 내세우고 뒤로 물러나게 되었다.
번 대통령 선거는 구보 씨를 더욱 주눅들게 했다. 모두 이번 선거는 세대 대결이었으며 젊은 세대들이 이겼다고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는 그런 얘기를 그대로 믿지는 않았다. 선거 기간에 젊은이들이 나이 든 세대에게 반감이나 경멸을 드러내는 것을 그는 보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번 선거가 세대 대결이 아니었다고 주장할 만한 힘도 의욕도 그에겐 없었다. 통계가 그렇다는데, 할 말이 있을 리 없었고, 무엇보다도, 이제는 밀려나는 세대에 자신이 속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어느날 그는 억지로 일거리 하나를 만들어내서 시내 출장에 나섰다. 낡은 차를 몰고 회사를 나온 구보 씨가 골목길을 들어서는데, 앞차가 갑자기 멈췄다. 그도 급히 멈췄는데, 이내 뒤쪽에서 다른 차가 그의 차를 툭 받았다. 그는 차를 세우고 내렸다. 뒤차에서도 사람이 내렸다. 그와 나이가 비슷한 사내였다.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그 사내가 어쩐지 낯이 익어서, 구보 씨는 얼른 대꾸하지 않고 그 사내를 살폈다. 혹시 김인석….
예. 제가….
이번엔 사내가 그를 유심히 살폈다.
아니, 이거 구보 형 아니오.
김인석 씨는 그의 대학 동창이었는데, 경영학 교수로 이름이 꽤 널리 알려진 터였다. 두 사람은 서둘러 차를 근처 주차장에 세우고 커피숍에 들어갔다.
내 차가 원래 고물이라, 신경 쓸 거 없어. 어차피 낡아서 바꾸려던 참인데.
보상해주겠다는 김 씨의 얘기를 구보 씨가 잘랐다. 보험 처리를 하면, 귀찮기만 하다.
그래도 그렇지, 일단….
십년 다 된 차다. 회사에 들어올 때 샀는데, 내가 한직이라, 차도 내주지 않아서, 그냥 몰고 다녔다.
얘기는 구보 씨의 회사 얘기로 흘렀다.
다 참고 견딜 만한데, 할 일이 없는 게 괴롭다. 내가 없어도, 회사가 잘 돌아간다는 생각을 하면, 정말….
김 씨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세상이 알아주는 경영학 교수잖나? 도움이 될 만한 얘기 하나 해 줄 수 없겠나? 얼굴에 열없는 웃음을 띠면서, 구보 씨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경영학 교수라는 게 뭐….
김 씨가 싱긋 웃었다. 그러더니 정색을 하고 구보 씨의 회사에 대해서 묻기 시작했다.
김 씨가 진지하게 여러 가지 사항들을 물어오자, 구보 씨도 차츰 신이 났다. 그래서 아내에게도 차마 털어놓지 못했던 일들을 그리 친하지 않았던 대학 동기동창에게 솔직히 얘기했다.
잠깐만, 얘기를 다 듣고 나자, 김 씨는 말했다, 만일 내가 자네라면, 난 이렇게 하겠네.
김 씨의 얘기는 구보 씨에겐 단비였다. 차분한 목소리에 담긴 동년배 경영학자의 지혜는 쉰 살을 넘긴 사내의 시들고 메마른 마음을 봄비처럼 촉촉히 적셨다. 구보 씨는 자신도 모르는 새 수첩을 꺼내어 김 씨의 얘기를 적었다.
얘기를 마치자, 김 씨는 구보 씨를 끌고서 근처 서점으로 갔다. 그리고 영어로 된 경영학 교과서 한 권을 건넸다. 차를 망가뜨린 것에 대한 보상이라면서.
구보 씨는 이 나이에 무슨 재주로 영어 책을 읽느냐고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김 씨는 잔잔한 눈길로 구보 씨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지금 우리 나이에 영어 책을 읽는 것이 쉽다는 얘긴 아냐. 사전 꺼내 놓고서 읽어. 정 못 읽겠으면, 제목이라도 훑어봐. 남는 게 있을 거다. 그 날 저녁부터 구보 씨는 그 책에 매달렸다. 물론 어려웠다. 당장 영어를 해독하는 일도 어려웠지만, ‘BUSINESS TODAY’는 그가 꼭 삼십 년 만에 잡은 경영학 교과서였다. 몇 번이나 그만두려 했었다. 그러나 자신을 믿어준 동기동창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다.
다행히, 읽기는 점점 수월해졌다. 그래서 연말까지 다 읽겠다고 다짐했던 책을 4월말에 끝냈다. 그 두툼한 영어 경영학 교과서를 덮은 날, 그는 아파트 베란다에서 달동네 불빛을 내려다보면서 가슴에 일렁이는 성취감을 즐겼다.
5월 15일 회사 창립기념식이 끝난 뒤, 구보 씨는 사장에게 문서 하나를 제출했다. 김 씨가 해 준 얘기에 자신이 경영학 교과서에서 얻은 지식들로 살을 붙여서 만든 회사발전전략이었다.
사장은 탐탁지 않다는 뜻을 얼굴에 역력히 드러냈다. 그 문서를 건성으로 넘겨보더니, 사장은 그를 쳐다보았다.
이런 건 왜 만들었나?
구보 씨는 말이 막혔다. 마음이 아득해지고 숨을 쉬기가 어려워졌다. 큰 기대를 할 수는 없다고 자신에게 일렀지만, 사장이 이렇게까지 심하게 나올 줄은 몰랐었다.
구보 씨가 얼른 대꾸를 하지 않자, 사장은 퉁명스럽게 덧붙였다, 시키는 일만 해.
일을 시키신 적도 없잖습니까? 자신도 모르게 볼멘 대꾸를 하고서, 구보 씨는 아차 했다.
시킬 일이 없으니까, 안 시킨 거 아냐?
장의 목소리도 커졌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공을 들여 만든 문서니까, 한 번 읽어봐 주십시오, 구보 씨는 물러서지 않고 대꾸했다. 어차피 여기서 물러나면, 끝이었다.
자기 방으로 돌아온 구보 씨는 책상 위에 놓인 열 개가 넘는 그 문서 사본들을 참담한 마음으로 내려다보았다. 사장의 칭찬을 들으면, 이내 간부 사원들에게 배포하려고 준비했던 터였다. 그는 서류를 집어 들었다. 개인 사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선 적어도 세 번의 위기가 닥친다. 성공적인 개인 사업을 회사 형태를 한 개인 기업으로 바꾸는 일은 위험한 과정이다. 기업가 혼자 하던 일들을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하므로, 권한과 책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위임하고 그들을 통제하는 절차의 도입이 필요한데 이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다음, 성공적 개인 기업을중소 회사 기업으로 바꾸는 일도 위험한 과정이다. 최고 경영자 개인의 판단과 활동을 회사 시스템의 판단과 활동으로 대치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회사는 바로 이런 과정에 있으며, 최고 경영자 위주로 짜여진 원시적 시스템을 보다 조직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구절은 구보 씨가 짠 전략의 핵심이었다. 아무리 여러 번 읽어도 싫증이 나지 않을 만큼 그의 마음에 드는 구절이었지만, 불행하게도, 사장은 그 가치를 몰라보았다.
8월 하순에 회사에 큰일이 생겼다. 여름 휴가를 떠난 사장이 교통 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그리 큰 부상은 아니라고 했는데, 사장은 좀처럼 퇴원하지 않았다. 사장이 실질적으로 모든 결정들을 내려온 터라, 회사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장은 11월에 퇴원을 했지만, 회사에 자주 나오지 않았고, 대신 전무로 들어온 사장 사위가 실질적 최고 경영자가 되었다. 구보 씨의 처지는 더욱 어려워졌다.
구보 씨가 사장 비서의 전화를 받은 것은 친구가 새로 차린 플라스틱 공장에서였다. 회사를 떠날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고서, 일자리를 찾아보던 참이었다. 크리스마스 전날이라 좀 들뜬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구보 씨의 마음은 착 가라앉아 있었다. 사장이 갑자기 그를 부른다면, 나올 얘기는 한 가지뿐이었다.
그를 보자, 사장은 반색을 했다. 어서 오게, 구보 감사.
안녕하셨습니까? 안색이 좀 나아지신 것 같습니다. 웃옷 안주머니에 든 사표가 무슨 든든한 자산처럼 여겨져서, 그는 마음이 푸근했다.
그런가? 사장이 뜻밖에도 느긋한 웃음을 홀쭉해진 볼에 올렸다. 앉게.
그가 소파에 앉자, 사장은 책상에서 서류 하나를 집어들고 와서 탁자에 내려놓았다. 내 이 서류 여러 번 읽었네.
그 서류의 제목을 본 순간, 구보 씨의 가슴이 뛰었다. 회사발전전략이었다. 사장 얘기가 빈 말이 아닌 듯, 때도 좀 묻었고 밑줄도 여러 군데 쳐져 있었다.
다 좋은 얘기들인데, 난 여기 회사도 기억이 있다는 구절이 맘에 들더구먼. 나이 든 사람들을 마구 내보내면, 회사의 기억이 많이 없어진다는 얘기 말야.
아, 예.
구보 감사, 내 이제 밝히는데, 저번 사고가 났을 때, 정밀 검사를 받았거든. 그랬더니, 간에 암이 조그만 게 하나 있어서.
아, 그러셨어요? 그래서요? 구보 씨의 목소리가 커졌다.
경과는 좋다는데, 뭐 두고 봐야지. 어쨌든, 절대 무리하지 말라는 거라. 이제 내가 회사 일을 전처럼 할 수가 없네. 구보 감사 얘기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구보 씨는 고개만 끄덕였다.
나 말곤 구보 감사가 이 회사 어른 아닌가. 그리고 집안이나 회사나 어른이 있어야지. 지금까지 자네가 대접 못 받은 거 내 잘 아네. 이제부터는 회사에서 감사 대접 제대로 하도록 할 테니, 자네가 좀…. 부탁이네.
그 날 저녁 구보 씨는 경영학 교수 김 씨를 불러내서 영업부장이 접대할 때 간다는 술집을 찾았다. 박봉인 그로선 걸게 산 셈이었다. 요새 젊은이들 식으로 하면, 화끈하게 쏜 것이었다. 그가 귀가했을 때, 가족들은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무슨 영화였다. 술이 깨기를 기다리다가, 따라서 보기 시작했는데, 재미가 있었다. 아니, 감동적이었다.
다 끝난 뒤에, 그는 딸에게 물었다, 그런데 영화 제목이 뭐냐?
제목요? 으음, 삼십사번가의 기적이에요.
글 복거일
▼작가 약력▼
△1946년 충남 아산 출생
△1967년 서울대 경제학과 졸
△87년 단편소설 ‘碑銘을 찾아서’로 등단
△대표적 작품 및 저서
88년 높은 땅낮은 이야기, 오장원의 가을
95년 캠프 시네카의 기지촌
97년 소수를 위한 변명
98년 자유주의 정당의 정책(자유기업 센터 평론집)/이것이 시장경제다(자 유기업센터)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