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보기 세상읽기]古典이 소설보다 더 재미있는 이유

  • 입력 2003년 1월 3일 18시 39분


김균
지난 학기에 새로 생긴 학교 구내서점을 구경도 할 겸 해서 연말에 서점에 들렀다. 꽤 오랫동안 어슬렁거리며 한가하게 네댓 권의 책을 샀다. 몇 해 전에 나온 은희경의 장편소설, 두 권짜리 논어, 문고판 몽테뉴 수상록, 역시 두 권짜리인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 등이었다. 그 중 논어는 올 겨울에 한 번 읽었으면 하던 책이었고, 은희경의 소설은 입시를 마친 딸아이와 같이 읽고 싶어 집어든 책이었다. 집에 와서 새 책들을 뒤적거리고 있자니, 여느 때와는 달리 고전을 여러 권 샀다는 사실이 새삼 마음에 짚였다.

평소 내 책읽기 버릇은 난삽한 편이었다. 손 가기 가까운 이곳저곳에 책들을 놓아두고는 여러 권을 동시에 읽어 나가는 스타일이었다. 책상에 정좌하고 정독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거실 소파나 방바닥에 이리저리 뒹굴면서 빠르게 페이지를 넘기는 게 훨씬 편했고 집중도 잘되었다. 또 어떤 독서계획이나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굳이 말하자면 나의 독서성향은 재미없는 책은 보지 않는다는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무협, 판타지소설 등속은 가끔씩 읽으면서도 최인훈의 ‘화두’는 중도에 포기해 버리기도 했다. 철학이나 사회과학 서적들도 논쟁이나 인물평전처럼 스토리가 있는 것을 특히 즐겼다. 식탐처럼 무익하기 짝이 없는 이런 재미와 양 위주의 독서버릇을 문득문득 후회하기도 했지만, 무질서한 책읽기일지라도 그것들이 내 마음속의 생각들과 화학작용을 일으키면서 쌓이게 되면 언젠가는 하나의 질서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겠느냐는 것이 내 스스로에게 준비한 나의 간사한 변명이었다.

그랬는데 몇 해 전부터 노안이 찾아왔다. 지금은 책읽기와 동시에 곁눈질로 텔레비전을 보는 것도 곤란하고 독서용 안경을 끼지 않고는 신문 읽기도 힘들어져 버렸다. 어떤 선배는 이 노화 현상은 이제 읽기를 멈추고 지금부터는 생각하라는 신의 섭리라고 했다. 그간의 방만한 책읽기가 다시금 후회가 되고, 이대로 간다면 나중에는 전공문헌조차 따라 읽지 못하는 처지가 될까 두렵기도 했다. 무엇보다, 읽는 재미 말고 또 다른 인생의 도락이 또 어디 있으랴 싶기도 했다. 그리고 벌써 읽었어야 했던, 그러나 굳이 읽으려 하지 않았던 수많은 고전의 목록이 머리에 떠오르면서, 고전 읽기가 튼튼했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학자가 될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없지 않았다. 더구나 서양학자들에 비해 우리의 학문적 성취가 빈약한 이유 중의 하나가 고전 읽기의 기초가 부실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일찍이 알았으면서도 말이다.

뒤늦게 고전을 찾는 까닭은 이제서야 비로소 고전의 존재 이유, 그리고 고전이 소설보다 더 재미있을 수 있다는 점을 조금 체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고전이란 어떤 것에도 기대지 않은 채 독자적으로 그러면서도 보편적인, 세계와 세상살이에 대한 해석일 것이며 내가 읽은 그 많은 책들은 이 해석의 다양한 변용에 불과할 것이다. 그래서 고전의 재미는 세계에 대한 이해와 애정과 함께 깊어진다고 할 것이다.

반밖에 남지 않은 입 안의 사탕 맛을 미욱하게도 이제야 겨우 알게 되었다. 더 열심히 즐겨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초조해 하지는 말고.

김 균 고려대 교수·경제학

1월부터 ‘책보기 세상읽기’의 필진이 바뀝니다. 새 필진은 김 균(고려대 교수·경제학) 김진호(목사·당대비평 편집위원) 오수연(소설가) 임상범씨(성신여대 교수·중국근현대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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