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드 휴즈는 ‘시작법(詩作法)’에서 자신이 어린 시절 어떤 물체에 생각을 앉히는 법을 배운 것은 학교가 아니라 낚시를 하면서라고 쓴 적이 있다. 수천 시간이 넘게 편두콩만한 찌를 응시하면서 그의 상상력은 정지해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분주한 물고기처럼 물밑을 드나들었을 것이다.
새로 나온 전동균의 시집 ‘함허동천에서 서성이다’(세계사)를 읽으면서 우리나라에도 낚시터의 시인이 있었구나 생각했다. 진정한 낚시란 무엇을 잡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비워내는 행위이며, 한가로운 여기(餘技)보다는 끊임없이 흔들리며 내적인 긴장을 가다듬는 수련에 가깝다는 것을 그의 시는 느끼게 해준다. 3, 4년이 멀다 하고 시집을 내는 요즘 세태에 비추어 등단 15년을 넘기면서 이제야 두 번째 시집을 묶는 그의 과묵함 역시 어둠 속의 그 고독한 시간들이 있어 가능했을 것이다.
찌를 응시하는 동안 시인의 마음은 삶의 심연 앞에서 얼마나 서성거렸던지, 한편 한편 읽으면서 그 섬세한 움직임이 되살아나는 것 같다. 그는 ‘마음이 마음을 견디지 못할 때/덜컹대는 흙길, 피멍 든 단풍골짜기 돌고 돌아/큰섬 앞 좌대에 짐을’ 부린다. ‘캄캄한 물 속 환하게 찌가 솟아오르는 순간’(물 위의 밤)을 숨죽여 기다리는 동안 거기에는 ‘어느 날 문득 손님처럼 찾아올 죽음과/중년의 허기’가 찾아들곤 한다. 그러나 무수한 환영 너머로 드물게 ‘나를 키운 모든 것들에게/사죄하듯 무릎 꿇고/온 천지 아득하게 지우는 빗줄기 저편/누군가 삐걱삐걱/쪽배 젓는 소리’를 듣게 되기도 한다. 심연 속에서 마음의 찌가 문득 움직이는 순간이란 바로 그런 때일 것이다.
그러나 시에서 ‘문득’이란 얼마나 많은 고통과 상실을 지불하고 난 뒤에야 찾아오는 순간인가. 그는 물을 바라보면서 실은 ‘근심 많은 삶보다도/낮아지는 것들, 이 세상에 있으면서/이 세상 게 아닌 것들의/욱신거리는 상처 속을/처음인 듯 마지막으로’(저 흰 돌들은)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슬픔의 물줄기가 이 세상과 다른 세상을 이어주고, 우리로 하여금 몇 번의 생을 살다 가게 해준다. 예를 들어 ‘冬至 다음날’에서 눈 위에 찍힌 낯선 발자국을 보며 돌아가신 어머니가 건네는 안부를 듣는 것이나, ‘주먹눈’에서 소주병을 든 김종삼 시인이 언 손을 내밀며 ‘뒷산 지붕도 없는 까치집에/나뭇잎이라도 몇 장 덮어줘, 그게 시야!’라고 일갈하는 모습은 삶과 죽음이 장엄하게 손을 잡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이르면 맑고 여리게만 보이던 전동균의 시가 어떤 깊이와 파장을 새롭게 얻어냈음을 확인하게 된다. 마치 ‘바위틈에 똑, 똑 떨어지는/물방울, 물방울들’에 ‘온 산의 능선이 시퍼렇게 휘어지’(물방울 소리)는 것처럼, 그의 시는 결곡한 정신과 물기 어린 서정성을 결합시켜 독특한 감염력을 발휘한다. 수없이 서성이고 출렁거려본 사람이라면 고요한 수면에 퍼지는 그 파장의 깊이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나 희 덕 시인·조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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