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 주류가 바뀐다]<1>인문학

  • 입력 2003년 1월 6일 18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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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지식인 사회와 문화 예술계가 새로운 지각변동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이번 지각변동의 화두는 주류의 이동(Power Shift Of The Mainstream). 한국 사회에서 가장 낙후됐다는 정치권에 50대 대통령이 등장하고 ‘젊은 정부’가 들어설 준비를 하면서 그 파급효과는 이미 사회 각 분야에서 감지되고 있다.

1990년대부터 정치권에 이른바 386세대가 상당수 참여하긴 했지만 그것은 사실상 ‘3김 정치’의 오랜 지배로 이미 ‘노쇠한’ 정치권을 지탱해 주기 위해 수혈된 ‘젊은 피’에 불과했다. 그러나 새 정부의 경우 선거운동 과정에서부터 주축이 된 40대 학자들이 대통령직인수위원회까지 이어지고 있을 뿐 아니라 정치에 무관심하던 20, 30대의 네티즌들이 문화운동 차원에서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를 실현했다는 점에서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이제 새 정부의 주요 직책에 젊은 지식인이 대거 참여하고 정책의 입안과 시행에 네티즌까지 포함하는 이들 세대의 의견이 실시간으로 적극 반영되면 한국 사회 전반은 본격적인 세대 교체의 국면에 들어서게 된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했던 문화 예술계도 이미 자연스러운 세대교체가 전망되고 있다. 특히 현실 변화에 민감한 예술계의 특성상 소재의 발굴에서부터 기획과 마케팅에까지 현재의 새로운 사회문화적 흐름을 효율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정책과 ‘새 인물’에 대한 요구가 거세질 것으로 예상된다.

지식인 사회를 비롯해 출판 종교 문학 공연 미디어 등 각 분야에서 벌어지고 있는 주류의 이동과 새롭게 떠오르는 인물군 및 그 의미와 과제 등을 10여회에 걸쳐 집중 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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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은 학문의 성격상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다른 분야에 비해 사회의 변화에 둔감한 편이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4·19 전후세대인 인문학계의 거목들이 잇따라 정년퇴임하면서 급격한 세대교체가 이뤄지고 있다. 인문학계의 변화를 문(文) 사(史) 철(哲) 세 분야로 나눠 조망해 본다.

문학=서울대 김윤식(국문학), 백낙청(영문학), 고려대 김우창(영문학), 연세대 이상섭(영문학) 교수의 퇴진은 문학계의 ‘큰 손실’이다. 물론 이들은 대학을 떠나서도 연구 및 지적 활동을 멈출 것으로 보이지 않아 정년 이후의 학문적 성취가 기대된다.

문제는 이들의 뒤를 이을 학자가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이미 60대에 들어선 경희대 도정일(영문학) 교수와 고려대 김화영(불문학) 교수가 문학비평에서 활약하고 있을 뿐, 전 세대 교수들에 버금가거나 이를 넘어설 후학들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 특히 문학뿐 아니라 인문학 전반과 정치학까지 아울렀던 김우창 교수의 폭과 깊이, 계간 ‘창작과비평’을 창간해 지식인 사회의 주요 이슈를 이끌어 온 백낙청 교수의 선도적 역할을 대신할 학자들을 기대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연세대 정과리(국문학), 고려대 이남호(국문학) 교수가 비평분야에서 활동하고, 동양의 신화 분야를 개척한 이화여대 정재서 교수(중문학), 계간 ‘창작과비평’ 주간을 맡고 있는 인하대 최원식 교수(국문학) 정도가 거론된다. 1970년대부터 문학계 전반에 영향을 미쳐 온 네 거목의 그늘이 워낙 큰 데다가 최근 소장학자들의 비평활동은 너무 전문화돼서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기 어렵게 됐다는 문제점도 지적되고 있다. 글쓰기를 통해 사회적 참여에 앞장섰던 선학들의 미덕을 배우지 못한 채 사람들이 읽지 않는 비평만 양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학=사학 중에서도 한국사학계는 자연스럽게 주류의 이동과 확산을 이뤄왔다. 1952년 한우근 김철준 천관우 전해종 고병익 등을 중심으로 창립된 ‘역사학회’가 식민사관 극복에 앞장섰고, 1967년 홍이섭 손보기 김용섭 강만길 등을 중심으로 창립된 ‘한국사연구회’가 분과활동을 통해 연구를 심화했다면, 1980년대 후반 ‘한국역사연구회’ ‘구로역사연구소’ ‘역사문제연구소’ 등을 만들며 근현대사 연구에 주력했던 젊은 세대가 이제 한국사 분야에서 소장학자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대표적 학자로는 서중석(성균관대), 박찬승(충남대), 도진순(창원대), 박태균(서울대), 윤해동(역사문제연구소), 신주백씨(성균관대) 등이 있다.

동양사 분야에서는 민두기 교수가 사망한 후 제자인 신라대 배경한 교수(중국사)가 그 학맥을 계승해 실증적 연구를 심화해 가고 있는 한편, 또 다른 제자인 연세대 백영서 교수(중국사)는 동아시아라는 틀 속에서 한국과 중국의 관계를 보며 새로운 연구방법론을 개척하고 있다.

서양사 분야에서는 기존의 사회경제사에 이어 문화사 연구가 새로운 연구방법으로 부상하고 있다. 서울대 최갑수 교수가 사회경제사 부문에 연구업적을 내고 있고 교원대 주명철 교수를 비롯해 경기대 김기봉, 한양대 김현식 교수가 문화사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철학=서양철학에서는 유럽철학 분야에서 서울대 한전숙, 소광희 교수가 퇴임한 뒤 같은 대학의 백종현, 박찬국, 김상환 교수와 한국외국어대 이기상 교수가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특히 이기상 교수는 2001년부터 ‘우리말로 철학하기’라는 학문운동을 주도하며 자생적 철학의 모색에 앞장서고 있다. 영미분석철학쪽에서는 서울대 김여수, 고려대 이초식, 이화여대 소흥렬 교수가 은퇴한 후 바로 뒷연배인 서울대 이명현 김효명, 서강대 엄정식, 이화여대 정대현 교수, 그리고 소장학자인 서울대 김기현, 서울시립대 선우환, 학술진흥연구원 이병덕, 고려대 정인교 하종오 교수 등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특히 과학철학 심리철학으로 그 영역을 넓힌 분석철학은 이제 세계의 구조와 언어의 구조가 대응관계를 이룬다는 관점에서 문화철학쪽으로 연구 방향을 확산시키고 있다.

동양철학계에서는 고려대 김충렬 윤사순, 성균관대 안병주 교수 등 거목이 퇴임한 후 아직 주목할 만한 학자가 드러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인문학계는 전반적으로 연구인력이 축적되고 연구역량이 갖춰져 이제 세부적으로 본격적인 연구성과를 기대할 단계에 와 있다.

그러나 인문학의 전반적인 침체 속에 소장학자들은 시간강사로 떠돌고 있고 다음 세대의 우수한 인력은 대학원에 들어오지 않아 향후 10년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다. 학문 후속세대의 재생산 구조를 다시 정비하는 것이 인문학계의 당면 과제다.

김형찬기자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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