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서는 미술품 소장이 자랑거리가 아니다. 자칫 치부수단으로 비쳐 세무 당국의 눈길이 닿을까 움츠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술평론가 유홍준(명지대) 교수는 “음악 애호가들이 좋은 음악회를 가고 음반을 모으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술 애호가는 애장품을 통해 깊은 정을 느끼고 말하지 않는 대화로 삶의 질을 고양시킨다”고 말한다.
각계 명사들이 자신이 아끼는 미술 애장품 1호를 꺼내 놓은 전시회 ‘나의 애장품전’(10일∼2월2일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을 둘러 보면 유교수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몇 십년씩 손때 묻은 귀한 미술품들을 보면 작품 소장(所藏)이 단지 호사가 아니라 사색의 한 방편임을 발견하게 된다. 더구나, 옆에 적힌 사연들을 읽다 보면 비록 살아있지 않은 물건이지만 피가 도는 것 같은 따스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애장품을 내놓은 이들은 모두 55명. 평균 두 점 씩을 내놓아 총 120여점이 모였다.
고 김원룡 박사의 아들인 서울대 의대 김종재 교수는 아버지가 작고 직전 병실에서 스케치한 ‘북한산 줄기’(1993)를 내 놓으면서 이렇게 적고 있다.
‘아버지는 호흡이 힘들어 지면서 병원을 나가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느끼셨는지 스케치북에 간단한 그림들을 그리셨다. 서울대 병원 9층 끝 병실에서 보이는 북한산 자락을 그리기도 했고 극심한 고통 속에서 병실 바닥에 떠오르는 생물들 얼굴을 묘사하기도 했다. 지금 북한산 자락은 대형 아파트들이 들어서 모습이 많이 변했지만, 그림을 보면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바깥을 내다보던 날로 수척해 가는 아버지 모습과 커다란 병실 유리창이 생각난다’.
홍사종 숙명여대 교수는 할아버지 때 부터 집에 걸려 있었던 100년된 백자 문패와 할머니가 즐겨 보시던 100년 된 운문 소설 책을 냈다. 함께 내놓은 동몽선습은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가르치기 위해 직접 필사한 것이라고 한다.
평생 월급쟁이 생활과 약간의 원고료 수입으로 생활했기 때문에 비싼 것을 들여 놓을 수 없었다는 서기원 전 KBS사장은 30여년 전 상호도 까마득한 인사동 가게에서 산 ‘조선백자 철회자연 무늬병’을 내 놓았다. 그는 ‘이 병을 보고 작은 충격이라도 받지 않는다면 감수성에 다소 이상이 있다’는 엄포(?)를 적어 놓기도 했다.
1970년대초 모 박물관 관장으로부터 얻은 호랑이 어금니(3X8X2cm)를 내놓은 허동화 자수박물관장은 “옛부터 호랑이 어느 부분이든 소유하면 액을 물리친다고 했는데 그래서인지 이 어금니를 얻는 순간부터 용맹스런 호랑이가 된 듯 마음이 든든했다”고 말했다.
이밖에 시인 김후란씨(부채 3점),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조찻상), ‘삶과 꿈’ 김용원 대표(겸재 정선 그림 2점), 삼성출판사 김종규 회장(김은호 그림과 청화백자), 서예가 김양동씨(벼루3점), 만화가 박수동씨(김환기 그림), 코리아나 화장품 유상옥 회장(노리개 2점), 직지사 성보박물관장 흥선 스님(고려 경쇄 등), 김형국 서울대 환경대학원장(장욱진 먹그림과 고려 불두), 건축가 김원(김정호의 별자리 그림 목판 인쇄)씨 등이 애장품을 공개했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이 보내준 연하장을, 수필가 이경희씨도 유치원 동창인 백남준씨가 만들어준 판화를 냈다. 02-720-1020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