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주로 백과사전이나 문학전집류에서나 사용했던 하드커버(두꺼운 표지의 소장용 책)로 만든 일반 교양서의 발간이 늘고 있다. 또 표지뿐 아니라 속지에도 책의 편집과 기획이 하나로 어우러진 세련된 디자인의 책들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
2년 전 처음 발간됐던 ‘경도’(생각의 나무)는 최근 도판을 대폭 보강해 대형판 하드커버로 새로 나왔다. 가격은 올랐지만 ‘고급책’을 지향하는 독자라면 선뜻 손이 갈 정도로 깔끔하게 단장됐다. 특히 최근 발간된 인문서 중에는 하드커버가 많다.
8일 교보문고 광화문점 인문도서 신간 진열대에 올라 있는 책 79종 중 절반에 가까운 39종이 고급 하드커버 책이다. 서점 관계자들은 “지난해부터 하드커버로 된 고급스러운 장정의 책들이 늘어나는 것을 현장에서 체감하고 있다”고 말한다.
#서점에 부는 고급화 바람
하드커버 책들의 판형이 다양해진 점도 특징이다. 최근 발간된 ‘사이언스북’(사이언스북스) ‘네 정신에 새로운 창을 열어라’(민음사) ‘톨킨백과사전’(해나무)’ 등은 백과사전만큼이나 큰, 대형 판형의 교양서적들이다. ‘서원’(열화당)과 ‘인듀어런스’(뜨인돌) 등은 변형 판형으로 제작된 책들. 글에 못지않게 사진과 그림의 비중이 큰 이들 책은 겉모습만 보고도 3만원에서 6만원까지의 만만치 않은 책값에 수긍이 갈 정도로 고품격의 디자인 감각을 살렸다.
책의 고급화엔 장르의 구분도 없다. 요즘엔 ‘사담 후세인 평전’(자전거), ‘커피의 역사’ (우물이 있는 집), ‘도도한 알코올, 와인의 역사’(시공사) 등 하드커버로 된 인문서들이 줄지어 나오고 있다. 추리소설인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의 작품 ‘뒤마클럽’(시공사)과 ‘프랑드르 거장의 그림’(열린책들)이 하드커버라는 사실은 만화인 ‘미스터 초밥왕’(학산문화사) 한정판이 하드커버 양장본인 점에 비하면 그리 눈길을 끌 만한 것도 아니다.
‘명문 종가를 찾아서’(컬처라인), ‘서울의 궁궐건축’(시공사)은 하드커버는 아니지만 각각 특수지를 사용하거나 부직포로 만든 듯한 표지로 차별화를 꾀했다.
교보문고 구매 담당 송수경씨는 “예전에는 주로 학술, 경제서적, 유아서적에 국한됐던 하드커버 단행본이 지난해부터 인문서와 예술서, 문학 등까지 영역을 넓혔다”며 “고전을 하드커버로 다시 장정해 발간하는 경우도 늘었다”고 말했다.
#소비자의 눈높이 변화인가, 생산자의 논리인가
책 고급화 바람이 부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는 ‘팔리기’ 때문이다. 출판평론가 표정훈씨는 “어린 시절 ‘조잡한 책’을 읽었던 30, 40대는 이제 책의 최대 구매층으로 떠올랐다”면서 “사회의 중심 세력으로 자리잡은 이들이 장서용으로도 적합한 고급스러운 책을 찾는 것 같다”고 말했다. 구매력이 생기면서 가격에 대한 저항 심리가 엷어졌다는 것. 표씨는 “20대의 경우도 같은 내용을 담고 있어도 ‘폼나는 책’을 찾는 심리가 작용해 역시 고급 디자인으로 눈을 돌린다”고 덧붙였다. 인터넷 등 가벼운 문화에 대한 반발 심리, 초판이 주로 하드커버로 발간되는 서구의 풍토에 대한 동경 등도 독자들이 하드커버 서적을 찾는 이유로 꼽힌다.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한미화 실장도 “요즘은 하드커버 장정으로 된 고급스러운 책을 제작하는 것이 일종의 유행처럼 자리잡았다”고 지적했다. 한 실장은 “고급화란 내용과 형식을 함께 일컫는 말”이라며 “구매력이 있는 성인을 타겟으로 한 인문교양 서적이라면 출판사로서는 ‘고급화’로 승부를 걸어볼 만하다”고 말했다.
책 고급화에 따른 문제도 있다. 일부 출판사는 유행에 영합해 ‘함량’이 떨어지는 책을 포장만 번드르르하게 해서 책값만 올리기도 한다. 책을 고품질로 만들다 보면 제작비가 어느 정도 상승하긴 하지만, 제작비 상승폭에 비해 책값을 훨씬 더 많이 매기는 사례도 있다.
한 출판사 관계자는 “하드커버 책값을 3만원으로 책정할 경우 1500부 판매를 손익 분기점으로 잡는 책이라면, 이 책의 가격을 1만원으로 내리고 ‘소프트 커버’로 만들어 팔면 4000부 정도는 팔아야 수지를 맞출 수 있다”고 말했다.
#외국의 경우는
미국과 일본 등 이른바 ‘출판 선진국’의 하드커버와 한국의 하드커버는 성격이 다르다.하드커버 시장과 ‘페이퍼 백(문고본)’ 시장이 확실하게 구분돼 있기 때문이다.
미국 출판사의 경우 ‘포스커밍 북스’(For-thcoming Books) 등의 잡지에 출판 3개월 전에 어떤 책을 낼지 예고한다. 도서관들은 이 같은 안내를 보고 책 주문 여부를 결정한다. 내용만 괜찮다면 대략 5만부 정도의 하드커버가 도서관 또는 장서가를 통해 소화된다. 일본에서는 하드커버로 나온 책이 1년 정도 뒤에 저렴한 문고본으로 다시 출판되는 것이 상례다.
연세대 문헌정보학과 한상완 교수는 “하드커버와 페이퍼백 시장이 따로 형성되려면 고급스러운 장서를 소화할 수 있는 사회적인 인프라가 우선 갖춰져야 한다”고 말했다.
한 교수는“특정한 책은 하드커버로 내더라도 대중서 등은 가격을 낮춰 독자에게 선택권을 주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주성원기자 swon@donga.com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