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의 관문격인 윈더미어 지방의 작은 마을 니어소리에는 연중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다. ‘힐탑’이라는 집을 보기 위해서다. 집 앞으로 작은 정원이 있고 나무들에 둘러싸여 있는 2층 높이의 건물. 겉으로 봐선 그저 평범한 옛날 집이다.
이 집의 옛 주인은 19세기말의 여성 동화작가 베아트릭스 포터. 전 세계 어린이들에게 사랑받는 동화 ‘피터 래빗’의 작가다. 대부호의 외동딸로 태어난 포터는 물려받은 토지, 농장 등 재산을 모두 사회에 환원했다. 포터가 막대한 재산을 기증하면서 원했던 것은 단 한 가지. 귀여운 토끼 피터의 ‘활동 무대’인 니어소리의 자연과 가옥들을 있는 그대로 보존해달라는 것이었다.
포터의 재산을 넘겨받은 곳은 1895년 세계 최초로 결성된 영국 내셔널트러스트(NT). 역사적 가치가 있는 건축물과 조형물, 지켜야 할 자연환경 등을 시민들이 사들여 보존하자는 취지의 NT운동은 포터의 도움으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갈 수 있었다.
● “대체할 수 없는 것들을 보호하라”
유명한 작가가 살던 집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이 힐탑을 찾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17세기 영국 전통 가옥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이곳에서 구석구석 남아 있는 역사의 더께를 감상하는 것. 그러면서 방문객들은 집을 원형 그대로 후손에게 물려주기 위해 애썼던 선조의 노력에 감사한다.
NT운동의 취지는 바로 이런 것이다. 건물이나 물건이 없어져 버려 역사도, 그곳에 얽힌 옛사람의 이야기들도 함께 사라져 버리는 불행을 막자는 것.
미국 내셔널트러스트(NTHP)는 ‘대체할 수 없는 것들을 보호하는 것(Protecting the Irreplaceable)’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있다. 1949년 결성 이래 현재까지 NTHP가 사들이거나 보호 가치가 있는 것으로 지정한 건물, 장소, 풍경은 모두 120여 가지.
지난해부터는 워싱턴에 있는 링컨 대통령의 오두막집을 복원하고 있다. 이곳에서 링컨은 노예 해방 선언서의 초안을 작성했다. NT운동이 링컨의 오두막집이나 코네티컷주 하트포드에 있는 마크 트웨인의 집 등 유명 인사의 유산만 대상으로 삼는 것은 아니다. 미국 NTHP가 매년 발표하는 ‘가장 위기에 처한 장소 11선(選)’에는 △프랑스풍 건물이 밀집한 미주리주의 세인트 즈느비에브 마을 △1926년에 지어진 테네시주 프랭클린시의 우체국 △워싱턴에 있는 의회 묘지 등이 포함돼 있다.
호주NT가 보유하고 있는 280여 개 유산 가운데는 감옥 경찰서 기차역 가게 여관 정원 등을 비롯해 오래된 자동차, 가내 수공업 시대의 기계 등도 있다.
니어소리의 경우처럼 마을을 통째로 사들여서 보존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영국 바스 지역 교외의 레이콕 마을이 여기에 해당한다. 영국 NT는 기증을 받거나 사들인 90여채의 가옥을 직접 관리한다. 집의 구조나 색상, 마을 구성원까지 엄격하게 통제하면서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 NT운동은 ‘꿩 먹고 알 먹는’ 운동
100년이 넘는 활동을 통해 영국 NT가 사들인 땅은 영국 전체 토지의 1.5%인 약 25만 헥타르에 이른다. NT가 영국 최대의 토지 소유자인 셈. 1965년부터는 해안 매입 운동을 벌여 약 600마일(965㎞)의 해안선을 관리하고 있다. 영국 전체 해안선의 18%에 해당한다.
보존 가치가 높은 곳을 매입했고 관리도 철저히 하기 때문에 자연히 관광 자원으로서의 가치가 높다. NT는 유적지 탐방뿐만 아니라 낚시 승마 같은 레포츠와 농촌 체험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해 수익원으로 삼고 있다. 일자리 창출, 농산물 판매 등 해당 지역의 경제에도 도움을 준다.
영화 ‘러브레터’의 무대로 유명해진 일본 홋카이도의 오타루에는 매년 1000만 명에 가까운 관광객이 찾아온다. 1923년 완공된 운하가 주된 볼거리. 이 운하는 1970년대 메워져 신작로로 변할 예정이었는데 주민들이 ‘역사 경관 지키기’ 운동을 벌여 운하를 지켜냈고 지금은 지역경제가 그 덕을 입고 있다.
미국 NTHP가 진행하고 있는 ‘메인 스트리트’ 보존 프로그램으로 옛 모습을 찾은 아이오와주 벌링턴도 성공 사례로 꼽히는 곳. ‘메인 스트리트’ 프로그램은 도로의 발달과 주요 기관들의 시 외곽 이전으로 점차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해가고 있는 다운타운의 본래 모습을 되찾자는 운동이다.
NTHP는 벌링턴 시내의 역사적 건물 세 곳이 해체 위기에 처하자 이를 사들였다. 세 건물을 비롯한 시내의 풍경을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하려는 프로그램이 진행되자 다운타운의 부활에 동참하는 업자들이 늘어났다. 1986년 프로그램 시작 이후 지금까지 80개의 새로운 사업장이 다운타운에 문을 열었다.
1895년 영국에서 100명의 회원으로 시작한 NT운동은 현재 미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 말레이시아 등 30여개국에서 전개되고 있다.금동근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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