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에 만나는 시]김재진 '달빛가난'

  • 입력 2003년 1월 10일 18시 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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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진 '달빛가난'

초오유, 안나푸르나, 시샤팡마, 칸첸중가…. 머릿속에 모래가 가득하다는 생각이 들 때, 돌아보면 살아온 것이 아득하고 내다보면 살아갈 일이 암담할 때, 그리하여 지금-여기가 영 마뜩찮을 때, 히말라야 연봉의 이름을 중얼거려 봅니다. 무슨 주문처럼 저 높은 산들의 이름을 이어가다 보면 박하사탕 먹은 듯 삶의 한편이 조금은 시원해지곤 합니다.

김재진 시인이 최근 펴낸 시선집 ‘달빛가난’(숨쉬는 돌)을 읽어가다가 몇 번이나 머릿속이 환해졌습니다. 이 시인은 방랑자였던 것인데, 방랑자 중에서도 지독한 방랑자여서 강원도 미시령이며 정선 아우라지를 바람처럼 떠돌다 가는, 아, 어느새 둔황 명사산이나 저 히말라야의 8000m급 고봉들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습니다. 겨울 강원도를 설국(雪國)이라고 명명하는 감수성이 히말라야로 이어지는 사태는 어쩌면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귀결이겠지요.

시인이자 평론가인 장석주씨가 김재진 시인을 놓고 ‘우리 시대의 마지막 서정시인’이라고 부르고 있듯이, 김씨의 시편들은 자주 자연이나 추억 따위와 동일시를 이루는 한편, 또 그만큼 자기 내면과 독대(獨對)하는 장면도 많습니다. 시인은 ‘감꽃 피는 집’에서 자화상 한 점을 선명하게 그려놓고 있습니다. ‘늦가을이면 가지 끝에 까치밥 하나 매달아놓고/다 내어준 허전함으로 바람에 묻어 울고 있는/키 큰 감나무’ 말입니다. 이 늦가을 감나무는 ‘운주사’에서 ‘그냥 선 채로 한나절 보내고 말’ 사미승의 눈물로, 다시 ‘길에 서서 길을 묻는’ ‘비루한 나그네’로 변주를 거듭합니다.

제자리에 서 있는 것으로 평생을 삼는 나무와 길 위에서 길을 묻는 나그네 사이는 멀어 보입니다. 그 거리는 그리움과 상처, 굴욕과 자책, 정착과 여행 사이의 거리입니다. 이번 시집은 크게 식물과 길(여행)의 이미지가 두 축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식물성이 두드러질 때, 시인의 감각은 자연을 향해 활짝 열려 있습니다. ‘아무도 만나지 않는 세월/초록이 남기고 간 힘으로 견디’거나 ‘알고 보면 (풀의) 향기는 풀의 상처’라는 발견에 도달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불행하게도 식물성과 나그네는 상극입니다. 식물성에는 움직임(이동)이 부재하고, 나그네에게는 정착이 결핍되어 있습니다. 나무와 나그네는 하나일 수 없는, 서로 분열증적인 관계입니다. 하지만 나무는 늘 길떠나기를 꿈꾸고, 나그네는 피곤한 몸을 누일 따뜻한 숙소를 희구합니다. 나무와 나그네는 ‘내 안에 있는 두 개의 나’를 은유하는 것이겠지요.

히말라야는 꿈도 꾸지 못하지만, 겨울 강원도는 손에 잡힐 듯합니다. 지난 여름 수해에 이어 이번 겨울에는 폭설이 잇따라, 가벼운 마음으로 대관령을 넘기가 저어스럽지만, 설악이 내려보내는 시린 바람으로 허파를 한껏 부풀려보고 싶습니다. 낙산사 홍련암쯤에서 동해를 바라보면, 김재진 시인이 시골집 마당에서 보았듯이, 파도가 ‘싸리비 흔적’으로 보일까요. ‘마음 비우듯 가지런’하다는 고운 비질 자국 말입니다. 은박지처럼 구겨지는 오전의 바다를 뒤로 하면, 아, 대청봉 싸한 눈 냄새가 훅, 하고 덮쳐올 것만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내 몸 늦가을 감나무였습니다. 내 마음 또한 고약한 나그네였습니다.

이 문 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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