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부위를 성형하듯 어색한 말투, 제스처, 시선 등을 뜯어 고치려는 것은 이른바 ‘말 성형’에 나서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스피치제닉(speechgenic)’을 꿈꾸면서 스피치 강좌를 듣고 있는 이들의 모습에 ‘말 배우기를 권하는 한국사회’의 단면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
●말 잘 하는 ‘공주’들
주부 박양신씨(43·서울 서초동)는 “에어로빅 피트니스 수예 등 주부 대상의 문화, 스포츠 강좌를 두루 섭렵한 주부들이 찾는 최신 프로그램이 스피치 코스다. 학부모 활동 및 봉사 활동 기회가 많아져 전업 주부들도 ‘말을 잘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커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열네살짜리 외동딸을 캐나다로 유학 보낸 주부 임원숙씨(43·서울 대치동)는 늘어난 자유시간을 각종 사회 봉사 활동을 하며 보내기로 마음먹은 뒤 스피치 강좌를 듣게 됐다. 임씨의 목소리나 말투는 성우처럼 또랑또랑한 데다 발음도 정확해 굳이 따로 스피치 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을 듯했다. 그는 새로운 대인 관계를 맺기에 앞서 전문적인 훈련을 받고 싶었다고 했다.
“남에게 ‘주장’하는 법을 배우기 위한 것이 아니에요. 봉사를 하려는 만큼 남의 말을 잘 들어주고 적절하게 응대하는 방법을 배우고 싶었어요.”
이명례 박사(58·서울 압구정동)는 불혹의 나이에 대학에 진학해 2000년 초 박사 과정을 마친 뒤 강단에 선 늦깎이 대학 강사다. 지난 학기에는 숙명여대에서 한국사 강의를 했다.
“어렸을 때 가부장적인 대가족 문화에서 자랐어요. 친정 어머니는 감정표현을 극도로 자제하는 전통적인 한국의 여인상이었죠. 딸이 목소리를 크게 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어요. 그래선지 저는 내내 말주변이 없었지요.”
결혼 후 인생의 대부분을 아내로서 또 세 아이의 엄마로서만 살았다. 강의를 앞두고 수십 명의 자식 또래 학생들 앞에 서기가 부담스러워 교육을 받기로 했다.
“오랫동안 ‘아줌마’로만 살아서인지 목소리가 너무 들떠있다는 자가 진단을 내렸어요. 목소리부터 바꾸고 싶었습니다. 반복적으로 복식 호흡을 연습하면서 여러 사람 앞에서 굵고 크게, 안정된 톤을 유지하며 말하는 법을 터득했습니다.”
최근 각 스피치 교육 기관에는 이 박사처럼 긴 ‘육아 휴직’ 후 재취업을 준비하는 주부들이 적지 않다. 주부로 지내며 소극적이 돼 버린 대인관계, 아마추어적인 언어습관을 교정하려는 것이다. 국제스피치언어학원 송미옥 원장은 “최근 보험, 생활용품 등의 다단계식 네트워크 마케팅 시장에 뛰어드는 주부들이 늘면서 상업적이되 천박하지 않은 세련된 세일즈 스피치를 배우고 싶다는 사람도 많다”고 전했다.
●가족간 말하기 예의도 배운다
타인에게 깍듯한 사람도 정작 가족들에게는 원색적으로 짜증내기, 약점 건드리기 등 말로 상처를 주기 쉽다. 그만큼 편한 상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핵가족화, 개인화한 데다가 인터넷의 발달로 세대간 언어습관 분화가 뚜렷한 현대 가정에서는 일방적인 ‘이심전심(以心傳心)’식 합리화, 지시 전달식 커뮤니케이션은 쉽게 충돌하고 만다. 가족간 커뮤니케이션 예의도 따로 배워야 한다는 인식을 가진 사람이 늘고 있다.
주부 김모씨(62·서울 여의도동)는 20대 후반의 신세대 며느리들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스피치 수업을 듣고 있다.
“꼬장꼬장한 시어머니를 모시고 35년간 시집살이를 했어요. 나도 모르게 며느리들에게도 똑같이 지시적인 말을 하게 되더라고요. 며느리들이 반항은 하지 않지만 우리 세대처럼 시어머니 등쌀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아닌 듯 했어요. 어느 순간 며느리들와 함께 아들, 손주들까지 멀어져간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변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스피치학원 선생님이 가르쳐준 대로 ‘많이 웃어라’ ‘가족의 손을 잡아주어라’ ‘집안일이 아닌 신문이나 방송에서 본 뉴스나 화제 거리로 이야기를 꺼내라’ ‘코믹한 유행어 하나를 반복하라’는 조언을 실천해 봤죠. 요즘은 며느리가 같이 쇼핑가자고 먼저 전화도 해요.”
주부 임모씨(41·서울 역삼동)는 한달 전 아이들 앞에서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에게 욕설을 퍼붓는 큰 실수를 저지른 뒤 최근 한 백화점 문화센터 강좌를 찾게 됐다.
“말을 하고 나서 스스로 당황했어요. 스스로 반성하는 의미에서 가족들에게 고운말을 쓰는 훈련을 열심히 받을 생각이에요.”
유명옥(48·서울 일원동)씨는 스피치 학원 유머 강좌에서 익힌 우스개들을 외어 남편에게 들려주며 ‘하루에 남편 한 번 웃기기’를 실천하려 노력하고 있다. 스피치 학원에서는 매주 한 번씩 재미있는 유머 한 가지씩을 찾아와 학급 동료들 앞에서 실감나게 발표하는 훈련을 시키고 있다.
“말 습관에 대해 신경쓰기 시작하면서 남편에게 ‘잘 다녀오셨어요’라고 건네는 말 한마디도 뉘앙스가 많이 달라졌다고 좋아하더라고요.”
현재 유씨는 대통령 선거 직전 후보자들의 TV 토론회 모습을 보고 불현듯 “나도 스피치를 배워야겠다”고 선언한 아들 김한석군(14·대왕중 2년)과 함께 여유롭게 말하기, 인간미 있게 말하기 등을 사이좋게 연습하고 있다.
또다른 스피치 강좌 수강생인 김미옥씨(52·서울 일원동)의 대학생 아들도 학원에서 배운 유머 한마디씩을 전하는 엄마의 ‘썰렁한 농담’에 배꼽을 잡는다.
“엄마가 코미디를 하면 정말 썰렁해. 그런데 그 썰렁한 모습이 더 웃겨. 그런게 요즘 정말 유행하는 코미디인데….”
국선도 강사 김모씨(34)는 스피치 수업을 받은 뒤 ‘자신감 있는 강사’에 덤으로 ‘사랑받는 남편’까지 됐다. 아내가 화를 내면 피하거나 일방적으로 무시하지 말고 눈 딱 감고 살갑게 말을 건네보라는 조언에 따른 결과였다. 단 한 문장에 아내의 화가 눈녹듯 사라졌다. “예쁜 얼굴 찡그리면 안 되지.”
●말 배우는 ‘선생님’들
‘공급 과잉’에 따른 동종 업체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의료 및 법률 서비스 전문직 종사자, 사교육 부문 강사들도 ‘말 성형’에 나서고 있다.
서울 구로동에서 회계사무소를 운영하는 회계사 한경열씨(42)는 ‘상대방과 눈을 맞추라’ ‘남 앞에 서는 것은 위기가 아니라 기회다’는 등의 덕목을 반복적으로 학습한 뒤 보다 적극적으로 고객 개발에 나설 수 있게 됐다. 스스로 내성적이라고 생각하는 한씨는 이전까지만 해도 직접 나서 고객을 개발하는 영업력에 자신이 없었다.
“회계사가 말 잘 해서 됐나요? 책하고 씨름해서 된 거지. 생각해 보면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토론, 토의 등 말 잘 하는 법에 대한 교육은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것 같아요. 한 학기동안 남 앞에 서서 발표하다보니 대인 관계가 한결 자연스러워졌어요. 사실 스피치 강좌는 아주 새로운 내용을 학습한다기 보다 훈련을 통해 스스로 한계라고 느꼈던 벽을 넘는 과정인 듯 합니다.”
서울 잠실에서 개인 치과병원을 운영하는 의사 최창규씨(57)는 환자들에게 보다 친절하게 대하는 법을 배웠다.
“피부과 치과 성형외과처럼 친절한 상담을 요하는 진료 과목의 의사들은 유머, 재치, 안정감 등이 큰 경쟁력일 수밖에 없죠. 병원간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단골 환자를 유지하는 비결이 될 것입니다.”
올 3월부터 서울 중곡동 국립정신병원에서 레지던트로 근무하게 된 이영훈씨(36)도 같은 이유로 스피치 학원을 찾았다.
“정신과 의사만큼 환자와 밀착해야 한다는 것을 절감하는 분야도 없겠죠. 상대의 반응에 피드백하는 기술, 사람들의 성향에 맞게 기분을 좋게 해 줄 수 있는 말하기 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학원 강사들도 암암리에 스피치 교육을 받고 있다. PMA스피치 클리닉 문준우 원장은 “학생들이 실력과 함께 ‘개인기’를 갖춘 강사를 선호하면서 현란한 손짓, 발짓 등 비언어적 수단, 신세대들이 선호하는 말투를 배우려는 사설 입시학원 강사들이 많다”고 말했다.
● 스피치 우등생을 꿈꾸며
호주 시드니에서 1년8개월째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는 김우영군(16·서울 풍납동)은 방학을 맞아 한국으로 돌아온 뒤 곧장 스피치 학원에 등록했다.
“그곳 학교생활에서 가장 갑갑한 것이 토론, 발표 수업이었어요. 그 곳 아이들은 나보다 공부는 못해도 발표는 잘 하더라고요.”
대전의 한 대학 전자과에 다니는 김호영씨(27·충북 옥천군)는 방학 동안 서울로 ‘스피치 유학’을 왔다. 지방에는 스피치 강좌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인터넷을 뒤져 학원을 정한 뒤 유학을 감행했다. 발단은 부쩍 늘어난 토론, 발표 수업이었다.
“준비한 자료를 발표해 성적을 매기는 날이었어요. 1시간 분량을 충실하게 준비해 갔죠. 막상 50여명의 학생들 앞에 서니까 얼마나 식은땀이 나는지…. 겨우 10분 발표하고 내려온 뒤 가슴을 쳤죠.”
경기 성남시 분당신도시의 인재입시학원 조규헌 이사장은 지난해 1월 서울 반포동에 ‘한국스피치커뮤니케이션연구소’를 내고 고3 수험생 및 일반인들에게 스피치 이론을 가르치고 있다. “입시학원에서 가르치는 문제 은행식 ‘족집게 구술지도’는 한계가 있더라고요. 원론적인 스피치 원칙에 따르는 것이 각종 인터뷰에서 순발력을 발휘하는 데 더 효과적입니다.”
인터뷰 기초 강좌에는 △추상적인 질문은 구체적 예로 답할 것 △구체적인 질문에는 추상적으로 답할 것 △본인의 인성이나 지망 분야와 관련된 내용은 결론부터 말하고 예를 드는 두괄식을 택할 것 등의 내용이 포함된다.
발표수업을 강조하는 제7차 교육과정이 도입된 후 ‘3분 스피치’를 수행 평가 항목에 추가하는 중학교가 많아졌다. 이에 따라 스피치 과외를 필수로 생각하는 중학생 학부모도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스피치 전문가들이 조언하는 '말 잘 하는 법' ▼
●모든 공식적 발언은 의식적으로 3분내에 마무리하라.
현대인들은 3분 이상 한 사람에게 집중할 수 없다. 3분간 할 수 있는 말은 글로 정리하면 200자 원고지 넉 장 분량.
●세상의 모든 정보에 귀 기울여라.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다보면 풍부한 화젯거리를 얻을 수 있다.
●사건 중심으로 말하라. 추상적인 발언은 신뢰도를 떨어뜨린다.
어떤 일이 있었고 무엇을 보았는지 신문 기사처럼 자세히 묘사하도록 노력한다. 묘사하다 보면 머릿속 한 가운데 숨겨둔 잘 안 쓰던 단어를 발견해 낼 수도 있다.
●아랫사람을 꾸짖을 때는 ‘샌드위치 화법’을 써라.
칭찬→ 비판→ 격려 순이다.
●말의 속도를 조절하라.
감칠맛 나게 말하는 사람들은 말의 늦고 빠름이 주는 효과를 안다. 강조하고 싶은 점, 숫자, 인명, 지명 등 사실을 나열할 때는 속도를 늦춰 정보의 전달력을 높인다.
●침묵을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라.
중요한 대목에서 상대의 눈을 응시하며 잠시 침묵을 지키는 것은 백마디 말보다 강력한 힘을 낼 수 있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도 이 방법을 자주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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