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요리]"나는 가려서 먹는다"… 選食男女

  • 입력 2003년 1월 23일 17시 24분


신석교 기자.촬영협조 ‘올가 ’
신석교 기자.촬영협조 ‘올가 ’
광고대행사 사장인 정기윤씨(32·서울 강남구 신사동)는 털털한 성격과는 달리 먹는 일에는 까탈을 부린다. 정 사장의 집에서는 화학 조미료를 전혀 쓰지 않는다. 멸치를 갈아 넣어 음식 맛을 내고 식초는 과일을 발효시킨 것을 쓴다. 마실 것도 집에서 담근 포도주스나 특정 브랜드의 생수만 고집한다. 사업을 하느라 바쁘지만 도토리묵 하나도 원재료를 직접 사다 집에서 만들어 먹는다. 수입 밀가루와 질 낮은 기름, 설탕이 듬뿍 들어간 과자는 절대 먹지 않는다.

영어학원 강사인 김현주씨(41·서울 양천구 목동)는 더 까다롭다. 아침에는 찐 감자와 우유를 먹는데 감자는 유기농으로 재배한 것이고 우유는 좁은 우리 안에서 성장호르몬이나 사료를 먹는 대신 농장을 돌아다니며 풀을 뜯어 먹고 사는 젖소의 젖이다. 김씨는 우유를 선택하기 전 농장에 내려가 방목 현장을 직접 확인했다. 고기는 먹지 않고 생선을 즐겨 먹는데 주로 조림이나 구운 것을 먹는다. 어쩌다 회를 먹을 때는 은이온액을 뿌려 살균한다. 식용유로는 포도씨 기름을 사용하고 가끔 외국 출장길에 오스트리아산 호박씨 기름을 사다 먹기도 한다.

정 사장과 김 강사 모두 어렸을 적에는 ‘아무 것이나 가리지 않고 먹어야 한다’고 배우며 컸다. 하지만 지금은 ‘가려 먹기’가 미덕이라고 여긴다. 가려 먹기는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한 성장 촉진 호르몬, 화학 비료, 방부제 등 각종 화학물질이 덩치 큰 약골, ‘호르몬 세대’를 키워냈다는 반성에서 생겨난 음식 문화다.

● 자연식으로 담백하게

가려 먹는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자연식을 한다. 농약이나 화학물질, 인공 첨가물 등이 들어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식재료를 사용하고 양념으로 맛을 내기보다 원재료의 담백한 맛을 살리는 조리법을 쓴다. 고기를 적게 먹고 채식 위주의 식단을 선호한다.

주부 허윤정씨(49·서울 강남구 수서동)는 특정 유기농 유통업체의 농산물만 주문해 먹는다. 주요 메뉴는 현미 잡곡밥 된장국 생선 김 야채 샐러드. 생선은 기름을 두르지 않고 구워서 그대로 먹고 김도 기름을 바르지 않고 살짝 구워 간장에 찍어 먹는다. 야채 샐러드는 드레싱 없이 야채 고유의 맛을 즐기거나 가끔 플레인 요구르트를 곁들이기도 한다. 외식 때도 조미료를 쓰지 않는 채식 식당을 이용한다.

약사인 지혜정씨(28·경기 안양시 안양2동)는 매일 아침 생식을 먹는다. 시중에서 파는 생식을 믿지 못해 6가지 곡물을 유기농 매장에서 사다 직접 갈아서 먹는다. 재료 고유의 고소하고 비릿한 맛이 좋아 음료수에 타지 않고 씹어 먹는다. 점심도 6가지 잡곡을 섞어 지은 밥에 나물 등으로 도시락을 싸서 먹는다.

자연식은 메뉴가 단순하지만 밥상을 차리려면 손이 많이 간다. 강원 강릉시에 사는 주부 정경희씨(43)는 하루 세끼 잡곡밥과 된장찌개를 먹는다. 잡곡밥은 현미가 절반이고 백미가 20%, 나머지는 콩 보리 수수 율무 등 기타 잡곡으로 배합한다. 콩은 아이들이 싫어해 방앗간에서 갈아다 놓아야 한다.

된장은 시댁에서 우리콩으로 담근 장, 두 가지 브랜드의 옻된장과 전통된장, 10종에 가까운 유기농 야채와 두부를 넣어 끓인다. 올 겨울에는 유기농 콩과 볏짚, 대나무 바구니를 구해 청국장을 띄웠다.

나물 반찬에는 감식초나 배식초를 사용하고 음료수는 유기농 야채를 발효 숙성시킨 효소를 사다 물에 희석시켜 마신다. 6세와 7세 연년생 형제는 유치원에서는 우유를 마시지만 집에서는 정씨가 만든 두유를 마신다. 요즘 같은 방학에는 간식으로 유기농 감자 라면에 된장을 풀어 끓여주거나 우리밀빵이나 찐빵 등을 사다 먹인다.

회사원 신지연씨는 음식을 담아 먹는 그릇도 가린다. 알루미늄 냄비와 코팅된 그릇, 플라스틱 그릇은 사용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잘 깨지지 않는 특정 브랜드의 사기 그릇도 플라스틱 성분이 함유돼 있다며 쓰지 않는다. 신씨는 옹기 그릇을 가장 좋아한다. 현미를 3시간 불려 옹기솥에 안치고 옹기 밥그릇에 밥을 떠먹고 옹기 김치통에서 김치를 꺼내 먹는다.

● ‘마이너스 클럽’

요즘 사람들이 가려 먹는 이유는 식성 보다는 건강 때문이다. 고기를 가리는 이유는 고기가 싫어서가 아니라 고기를 생산해내는 환경의 건강성을 의심하기 때문이다. 햄버거를 먹지 않는 이유도 햄버거 맛은 좋지만 패스트푸드를 불신해서다.

몸에 나쁜 음식을 체험적으로 가려내 먹지 않는 사람들의 모임이 ‘마이너스 클럽(minusclub.org)’이다. 회원들 대부분이 알레르기성 비염, 장염, 아토피 피부염 환자였고 음식 조절을 한 결과 병세가 호전된 경험이 있다. 이들은 건강이 회복된 후에도 ‘환자식’을 고수하고 있으며 입소문이 나면서 건강한 사람들도 합세, 2001년 4월 시작된 이후 회원이 6500명으로 늘었다.

마이너스 클럽 회원들은 몸을 위해 보약을 먹기보다(플러스) 몸을 상하게 하는 음식을 안 먹는(마이너스) 방식으로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몸에서 냄새가 나면 향수를 뿌릴 것(플러스)이 아니라 더러운 때를 씻어내야(마이너스) 한다는 논리다.

마이너스 건강법의 골자는 육류와 밀가루, 인스턴트 식품을 먹지 않는 것이다. 항생제와 성장호르몬을 투여한 고기를 가급적 먹지 말고, 방부제가 들어 있는 수입 밀가루를 먹지 말며, 인공 첨가물이 들어간 인스턴트를 먹지 말자는 이야기다. 고기뿐만 아니라 우유와 유제품, 달걀도 가린다. 소나 닭이 오염돼 있다면 최종 산물인 젖과 달걀에는 오염 물질이 더욱 축적돼 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회사원 유승은씨(31·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는 영국에서 2년간 유학하고 돌아온 후 장이 탈이 나고 알레르기성 비염이 악화됐으며 얼굴은 온통 뾰루지로 뒤덮였다. 유씨는 마이너스 클럽을 이끌고 있는 한의사 손영기씨(33)에게 치료를 받으며 밀가루와 육류 위주의 서구식 식단을 마이너스 식단으로 바꾸었다. 백미는 전혀 먹지 않고 현미 70∼80%에 콩 보리 수수 조 등 잡곡을 섞은 밥에 된장찌개를 먹었다. 밀가루는 전혀 먹지 않고 고기도 피할 수 없는 회식 자리가 아니면 먹지 않았다. 지금은 속도 편해지고 비염도 나았으며 피부도 깨끗해졌다. 유씨는 점심도 도시락으로 해결할 정도로 마이너스 식단을 고수하고 있다.

● 번창하는 유기농 산업

가려 먹는 시대의 대표적 성장산업이 ‘유기농’이다.

제일기획은 2001년과 2002년 전국 2800명의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유기농 농산물 소비 실태를 조사했다. 그 결과 전체 응답자의 29.8%가 유기농 농산물을 먹는다고 답했다. 지역을 서울로만 좁혀보면 응답자의 30.7%, 월소득 500만원 이상인 가구의 경우 45.7%가 유기농 농산물을 먹는다고 답했다. 한국유기농업협회에 따르면 지난 한해 동안 유기농 식품의 매출 신장률은 50∼60%였다. 전국의 백화점, 할인점과 대형 슈퍼마켓에는 빠짐없이 유기농 산품이 들어가 있고 이 밖에 130여개의 유기농산물 매장이 있다.

유기농 과일과 채소로 만든 빵과 샐러드 등을 판매하는 오가닉 델리(organic deli)도 문을 열었다. 유기농 제품과 식품 생산 유통업체 리앤코 시스템은 지난해 10월 서울 양천구 목동 현대백화점, 11월에는 강남구 청담동에 오가닉 델리 ‘반(盤)’을 잇달아 열었다.

“우리의 고객은 건강해야 하고 살이 찌면 안 된다.”

리앤코 시스템이 ‘반(盤)’을 시작하면서 내부적으로 공유한 컨셉트다. ‘반’에는 유기농 농산물을 이용해 만든 샐러드와 샌드위치, 우리밀로 구운 빵, 캘리포니아롤, 아보카도롤 등과 각종 드레싱, 유럽산 치즈, 와인 등이 있다. 청담동과 압구정동 주민들 50여명은 ‘반’ 청담동점에서 갓 구운 빵으로 만든 샌드위치에 방금 갈아낸 생과일 주스를 아침 메뉴로 정기적으로 배달해 먹는다.

유기농 붐이 일자 공급이 수요를 따라잡지 못하는 현상도 빚어지고 있다. 오가닉 델리 ‘반’도 100% 유기농을 추구하지만 현재는 야채만 유기농으로 사용하고 있다. 한 유기농산물 유통업자는 “시중에 나도는 유기 농산물의 30%는 가짜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털어놓았다. 이 때문에 최근에는 중국산 유기농산물을 수입해 판매하는 업체도 생겼다.

이진영기자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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