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높지만 가파르거나 험하지 않아 등산객들에게 인기 만점인데다 산 정상에는 태고적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내온 천제단이 있어 매년 1월1일엔 새해 소망을 기원하는 장소로 각광받고 있는 태백산.
뿐만 아니라 천제단에서 바라보는 일출광경이 기가 막히다고 소문난 태백산 체험.
‘해야 떠~라 해야 떠~라 말갛게 해야 솟아~라 고운 해~야 모든 어둠 먹고 앳된 얼굴 솟아~라’
‘뜬금없이 웬 시 한편?’인가 싶겠지만 80년대 중반 대학가요제에서 연세대 그룹 마그마가 불렀던 노래 ‘해야’의 한 구절이다. 아마도 386세대 중 음악과 담 쌓고 산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노래이리라. 빨리 솟아오르라고 다그치는 듯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열창하던 가수를 볼 때마다 기자는 늘 이글이글 타오르며 벌그스름하게 떠오르는 해를 연상하곤 했다. 그런 때문일까? 날마다 떠오르는 해이건만 때가 때이니 만큼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유난히 이 노래가 입안에서 맴돌곤 했다.
요즘은 새해가 되면 전국의 모든 사람들이 일출을 보기 위해 동해안으로 몰려드는 것이 아예 고정행사처럼 되었다. 때문에 이즈음이 되면 설이나 추석 연휴기간에 치르는 교통대란 뺨칠 만큼 교통 몸살을 앓기도 한다.
그렇다고 장엄하게 떠오르는 해를 보며 새해 소망을 비는 소박한 꿈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 그렇다면 이번엔 너도나도 구름처럼 몰려드는 동해바다가 아닌 산으로 올라가 보면 어떨까. 정동진이나 낙산사처럼 해맞이 장소로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등산객들 사이에선 ‘이보다 더 좋은 해맞이 장소는 없다’고 입소문이 난 곳이 바로 태백산이다.
산이라는 것이 사시사철 흠잡을 것 없이 다 좋지만 태백산은 특히 겨울에 가야 제맛이라는데…. 눈 덮인 태백산을 한번쯤이라도 본 사람은 그 멋을 잊지 못해 겨울이면 다시 찾는다고 하니 왠지 구미가 당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겨울산행이라는 게 어디 그리 만만하게 볼 일인가! 추운 날씨도 문제거니와 눈이 오면 무엇보다 안전사고의 위험도 적지 않다. 기자의 경험상 다른 건 몰라도 이런 종류의 여행은 개별적으로 가는 것보다는 전문 가이드가 있는 여행사에 의뢰해 함께 가는 것이 좋을 듯싶다(무박2일 코스는 왕복 열차이용료(무궁화호)를 비롯해 현지 차량비, 태백산 입장료(석탄박물관), 중식 1회, 여행자 보험료를 포함하여 어른 6만9천원, 아이 5만9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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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는 시골역에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폴짝폴짝 뛰던 사람들
특히 태백산은 매년 1월 중순에 태백산 눈축제(올해는 1월18일부터 26일까지 9일간 열린다)가 펼쳐져 이에 맞춘 태백산 눈꽃 관광열차 상품들이 물 만난 고기처럼 성행을 이뤄 비교적 수월하게 여행을 할 수 있다.
게다가 강원도 산골이라는 게 불쑥불쑥 내리는 폭설로 자동차로 가다 보면 자칫 낭패를 보기 십상 아닌가. 그러고 보면 기차여행은 일단 점수를 따고 들어가는 셈이다.
태백산 눈꽃열차는 대부분 청량리역에서 출발한다. 당일코스도 있고 온전한 1박2일 코스도 있지만 기자가 선택한 것은 밤 11시에 출발하는 무박2일 코스. 한밤의 기차여행이라… 몸은 좀 피곤할지라도 왠지 낭만적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태백역까지 가는 시간은 4시간30분. 어차피 깜깜한 밤이라 밤 풍경을 보긴 어렵고… 짧은 시간이나마 기차 안에서 잠을 청하면 그런 대로 알뜰한 여행일정이 될 것 같았다.
토요일 밤 10시40분경. 비교적 늦은 시간이라 조용할 거라 생각했던 청량리역은 웬걸? 밤기차를 타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뽀얀 김을 내뿜으며 손님을 기다리는 기차를 보니 어디론가 멀리 떠난다는 느낌이 들면서 묘한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기차 특유의 규칙적인 바퀴소리를 들으며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태백역. 노르스름한 불빛으로 가득한 플랫폼에 내리는 순간 시골역 특유의 고즈넉함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게다가 하얀 눈까지 폴폴 날리고 있는 새벽녘의 시골역 모습이란(이는 정말이지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선 논할 자격이 없다)…. 사람 마음은 다 똑같은가 보다. 기차에서 내리는 사람마다 태백역 풍경에 감동받은 듯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다들 강아지처럼 폴짝폴짝 뛰면서 눈싸움을 하고 심지어 역무원을 붙잡고 기념사진까지 찍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긴, 도심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이니 그럴 만도 하지 싶다.
태백역에서 버스를 타고 태백산 산행의 시발점인 유일사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30분. 막간을 이용해 가이드가 주의사항을 일러주었다. 여러가지 주의사항 중에서 정말이지 귀기울여 들어야 할 대목은 바로 화장실. 유일사 입구에 있는 화장실 외에 산 정상에 오르기까지 단 한군데도 없기 때문이다. 간혹 그 주의사항을 무시했다 고생(?)한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것.
산에 오르기 위해선 반드시 모자와 장갑을 준비해야 한다. 취재 당시 눈은 펑펑 내리는데 모자가 없어 ‘맨머리’로 산을 오르는 사람을 보니 어찌나 안됐는지…. 스스로도 눈을 하얗게 뒤집어쓴 머리를 수시로 털어내며 ‘내가 태백산에서 가장 불쌍한 놈’이라고 중얼거리는 모습을 보고 모두들 웃기도 뭐하고 참기도 뭐해 어정쩡한 표정을 지었던 게 생각난다. 옷도 무조건 두꺼운 것보다는 일단 바람이 안 통하는 것이 가장 좋다(산 정상에 오르면 정말 바람이 장난이 아니다). 또 하나 필수품은 아이젠(자동차로 치자면 바퀴에 끼우는 체인인 셈). 눈길에 장사 없다고, 강원도 고개를 넘을 때 눈이 오면 체인 없는 차량을 돌려보내듯 경험컨대 이곳에선 아이젠을 착용하지 않은 사람은 입산금지를 시켜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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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산을 많이 다니는 사람들이야 아이젠을 갖추고 있지만 기자처럼 어쩌다 한번 산에 오르는 사람이 아이젠이 있을 리 만무. 하지만 유일사 매점에서 우리 같은 사람들을 위해 아이젠을 판매하고 있으므로 염려할 필요는 없다. 최하 6천원에서 2만원짜리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이런 경우 대개는 중간치를 구입하는데 산을 자주 오르는 경우가 아니라면 6천원짜리도 무난하다. 하지만 산에 오를 때 자칫 벗겨지는 경우가 있으니 처음 신발에 착용할 때 단단히 고정시켜야 한다.
아무리 좋은 것도 급하게 먹으면 체하는 법. 산에 오르긴 전에 가볍게나마 맨손체조를 하고 올라가야 한다. 초보자도 쉽게 오를 수 있을 만큼 가파르지 않은 길이라 해도 산은 산이니까.
모든 준비를 마치고 드디어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30cm는 족히 쌓인 눈길을 밟는 순간, 뭐랄까 폭신한 카펫을 즈려 밟고 가는 느낌이다. 곳곳에 숨겨져 있는 지뢰처럼 간간이 튀어나온 돌멩이들 때문에 미끄러지기도 했지만 수북하게 쌓인 눈 위에 넘어지는 기분도 꽤 괜찮았다. 그칠 줄 모르고 쏟아지는 눈에 바람도 제법 불었지만 양옆으로 감싸고 있는 나무가 바람막이가 되어 그다지 추운 느낌은 들지 않았다.
우와! 세상에 이런 별천지는 처음 보네요
그러나 천제단이 있는 산 정상에 오르니 우와! 바람이 장난이 아니다. 높이가 1500m가 넘는데다 사방이 뻥 뚫려 있어 그 어디에도 바람을 피할 곳이 없었다. 마치 에베레스트 봉우리에 올라 극기훈련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산 정상에는 비교적 아담 사이즈에 속하는 기자의 키보다 훨씬 낮은 키 작은 나무들만 있어 바람막이가 돼주지 못하니 그럴 수밖에. 그야말로 ‘바람맞는’ 기분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온몸이 덜덜 떨렸지만 그래도 정상에 올랐는데, 야호 소리라도 한번 내보자 싶어 있는 대로 소리를 지르고 보니 정말이지 속이 다 후련해진다.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본래의 취재 목적이었던 산상에서의 일출을 보지 못했다는 것. 눈이 올 때 오르면 태백산의 참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지만 해돋이를 보는 건 틀렸고, 해돋이를 보자면 눈이 안 오는 맑은 날에 올라야 하는데 이는 ‘앙꼬 없는 찐방’처럼 밍밍하고… 세상 이치가 그렇듯 역시 한번에 둘을 얻을 수는 없는 모양이다. 그 와중에 두가지 맛을 다 볼 수 있는 방법은 눈 온 다음 맑은 날 올라가는 것이라고 한다. 어쨌거나 하늘의 도움이 따라줘야 할 일이다.
정상에 올랐다고 생각하니 약간은 피곤한 기운과 함께 뭔가 따끈한 게 생각났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그 낌새를 알아차린 가이드가 “여기서 10분쯤 내려가면 망경사라는 절이 있는데 거기서 컵라면 먹으면서 몸을 녹일 수 있다”고 하자 갑자기 군침이 돈다.
온통 하얀 눈속에 희미하게 보이는 불빛…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듯한 기분이다. 산속에서 덜덜 떨다 사찰 한쪽에 있는 방에 들어가 따듯한 온기를 느끼는 그 맛이란… 밤새 기차를 타고 새벽부터 산에 오르다 보니 속이 출출한 건 당연지사. 그 순간에 맛보는 컵라면… 그야말로 ‘이보다 맛있는 컵라면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소리가 절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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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의 티라면 망경사에 등산객들을 위한 쉼터가 없다는 것. 우리가 들어간 곳은 등산객 쉼터가 아닌 기도하러 온 불자들이 머무는 방으로 그곳 불자들의 눈치를 수없이 봐야 했다. 산을 넘어와도 쉴 곳이 마땅치 않은 등산객들을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는 터라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방을 내주긴 했지만 아무래도 성가신 모양이다. 라면 국물을 채 마시기도 전에 ‘빨리 먹고 나가라’는 소리를 듣다 보니(한번도 아니고 여러번) 왜 그리 서러운지(사실 서럽다기보다 기분이 씁쓸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내려가는 길도 만만치 않은데… 갖은 눈치 속에서도 모두들 한 방울도 안 남긴 채 라면 국물을 다 마시고 90도 각도로 인사를 한 후 망경사를 나섰는데, 어라? 세상 전체가 하얀 눈으로 뒤덮인 게 별천지 같다.
눈꽃이 활짝 핀 나무들이 저마다 하얀 손을 내밀고 악수를 청하는 듯했고 눈 덮인 바윗덩이들이 몽글몽글하게 놓여져 있는 맑은 개울물, 얽히고설킨 나뭇가지들이 만들어놓은 자연산 눈터널, 심지어 눈으로 뒤덮인 간이화장실마저 예쁜 산장처럼 보이다니…. 게다가 내리막길에서 비닐을 타고 무공해 눈썰매장을 신나게 내려가는 사람들(태백산에 와본 사람들은 이렇게 비닐을 준비해와 자연산 눈썰매를 탄다고)….
도심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느낄 수 없는 이 맛 때문에 겨울의 태백산을 찾는다는 걸 확실하게 체험할 수 있었다. 그런 체험 끝에 다짐한 것 한가지. ‘올겨울이 지나기 전에 다시 한번 태백산을 찾으리라.’ 눈 온 뒤의 맑은 날을 택해서…
■ 글&사진·최미선 기자(tig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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