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컨대 ‘밀양아리랑’ 계열의 아리랑은 씩씩하고 약동적이며 낙천적 정서를 표현하고 있다. 또한 아리랑은 모내기, 김매기에서 두레꾼들이 합창하는 중요한 ‘노동요’로도 발전하였다.
아리랑이 천수백년을 다양하게 계승 발전해 오는 동안에 노랫말과 가락은 수천개가 창작, 탄생했지만 변하지 않고 전승되어 오는 것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등의 노랫말이다.
이것이 뜻을 모르게 된채 변함없이 반복되기 때문에 이제는 ‘후렴’이나 ‘앞소리’처럼 되었다.
현재 ‘아리랑’은 임진왜란 무렵 때부터의 것이 채록되어 있다.
△임진왜란 무렵
할미성 꼭대기 진을 치고
왜병정 오기만 기다린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게
△병자호란 무렵
오라배 상투가 왜 그런고
병자년 지내고 안그런가
(아리랑 후렴)
△흥선대원군 집정 무렵
조선 팔도 좋다는 나무는
경복궁 짓느라고 다 들어간다
(아리랑 후렴)
현재 표준적으로 불리는 다음의 아리랑 노랫말은 아리랑 부분 외에는 일제 강점기에 변형 작사된 ‘신 아리랑’이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데리고 가시는 님은
백리를 가도 날아서 간다.
여기서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는 다음 절인 ‘나를 데리고 가시는 님은 백리를 가도 날아서 간다’의 대응이다. 밀양 아리랑 계통의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는 ‘곱고 그리운 님이여 고개를 넘어 멀리 떠날 때도 나를 데리고 가소’의 뜻이다.
승려 시인 한용운(韓龍雲)이 일찌기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그리운) 것은 다 님이다’는 명구를 쓴 바와 같이, ‘아리랑’(곱고 그리운 님)은 남녀의 연정만을 표현한 것이 아니었다. 한국민족은 ‘곱고 (사무치게) 그리운 것’은 모두 ‘아리랑’으로 표현하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 캄캄한 어둠의 시대에는 남녀의 연정보다 민족의 ‘자유’ ‘해방’ ‘독립’이 더 절실한 아리랑이었다. 한국인들은 일제 침략자들을 아리랑으로 풍자, 비판, 저항하고 민족의 ‘자유’ ‘해방’ ‘독립’을 아리랑으로 노래하였다.
인천 제물포 살기는 좋아도
왜놈의 등살에 못살겠네.
(아리랑 후렴)
일본 대판이 얼마나 좋아서
꽃같은 나를 두고 연락선 탔는가.
(아리랑 후렴)
산천초목은 의구(依舊)한데
이 땅의 주인은 어데갔나.
(아리랑 후렴)
풍년 들어도 먹을게 없어
북국의 벌판을 찾아 갔나.
(아리랑 후렴)
논밭은 헐어서 신작로 되고
집은 헐어서 정거장 된다.
(아리랑 후렴)
말깨나 하는놈 감옥소 가고
일깨나 하는놈 북망산 간다.
(아리랑 후렴)
일제를 타도하기 위해 싸우던 독립군 광복군들도 ‘광복군 아리랑’을 불렀다. 그러므로 ‘아리랑’은 한국인들이 사랑하고 소망하는 ‘곱고 그리운 님’ ‘아름답고 사무치게 그리운 것’은 모두 ‘아리랑’으로 상징화되었다. 우리시대 한국민족에 가장 곱고 사무치게 그리운 ‘아리랑’은 어떤 ‘아리랑’일까? ‘통일아리랑’이 아닐까?
신용하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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