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문화부는 24일 문학 장르와 세대를 고려해 선정한 소설가 시인 평론가 등 103명에게 현재 활동하고 있는 문학 분야의 ‘고수(高手)’를 추천해달라는 설문을 발송했다.
문항은 앞서 소개한 항목 외에 ‘가장 주목할 만한 20, 30대 작가’ ‘최고의 명문장가’ ‘최고의 문예지’ ‘책을 내고 싶은 출판사’ 등 모두 15개였다. 응답자에게는 각 항목에 대해 3명 또는 3곳의 출판사나 문예지를 추천해줄 것을 의뢰했다.
이 중 ‘발표한 작품에 비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작가’를 묻는 문항의 경우 문인들이 꼽아준 작가들이 대부분 1, 2표씩을 얻는 데 그쳐 이 항목은 결과에서 제외했다.
28일 마감까지 설문에 응한 문인은 모두 71명으로 69%의 회수율을 기록했다. 문항에 따라 답을 하지 않거나 1, 2개의 응답을 보내 온 경우도 동등하게 합산했다.
산 결과 ‘최고의 소설가’ 부문에는 최근 들어서도 활발하게 작품을 쓰고 있는 황석영이 가장 많은 추천(29명)을 받았다. 응답자들은 그의 작품 중 ‘삼포가는 길’(추천횟수 6) ‘객지’(6) ‘손님’(5)을 대표작으로 꼽았다. 이어 박경리와 최인훈이 각각 18명의 추천을 얻었다. 두 작가의 대표작은 ‘토지’(13)와 ‘광장’(12)이 꼽혔다.
17명이 추천한 이청준에 이어 ‘난해 소설가’ 박상륭이 13명의 추천을 받았다. 박상륭의 경우 선호작을 묻는 질문에 답하지 않은 1명을 제외하고 하나같이 ‘죽음의 한 연구’를 좋아하는 작품으로 선정했다.
‘최고의 시인’을 묻는 질문에는 ‘농무’(14) ‘목계장터’(6)의 신경림이 24표, ‘황토길’(5) ‘타는 목마름으로’(4)의 김지하와 ‘만인보’(5) ‘문의마을에 가서’(4)의 고은이 각각 19표를 얻었다.
26명으로부터 추천을 받아 ‘최고의 평론가’로 꼽힌 유종호에 이어 김윤식과 김우창이 각각 21표, 백낙청 16표, 김병익과 정과리가 각각 10표를 기록했다. 40대 중반의 정과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1930년대 생, 60대의 평론가들이 상위를 차지한 것은 차세대 평론가들의 분발이 필요하다는 점을 시사하는 대목.
가장 주목할 만한 20, 30대 작가로는 김영하가 31명으로부터 추천을 받았고, 천운영이 15표를 얻었다. 김연수 김종광 조경란이 그 뒤를 이었다.
인과 그 작품의 특성을 묻는 각 질문에서는 항목마다 한두 명의 문인들이 뚜렷하게 부각됐다. ‘명문장가’로는 문학평론가 김화영이 12명의 추천을 얻었으며, ‘감수성이 뛰어난 작가’에는 20표를 얻은 신경숙이 첫손에 꼽혔다. ‘이야기꾼’으로는 황석영이, 해학과 풍자에 능한 작가로는 성석제가 많은 지지를 얻었다. ‘실험정신’으로는 이인성이 35표를 받았고 ‘토속성’을 띠는 작가로는 이문구가 압도적으로 52표를 얻었다.
‘최고의 문예지’는 ‘창작과 비평’, ‘책을 내고 싶은 출판사’에는 ‘문학과 지성사’가 각각 꼽혀 일각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창비’와 ‘문지’가 우리 문학인들의 동반자요, 한국 문학의 요람임을 입증했다.
▼차세대 리더작가 김영하▼
‘가장 주목할 만한 20, 30대 작가’ 부문에서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소설가 김영하(35)는 한국 문학을 이끌 차세대 작가군의 중심에 서있다.
김영하는 1995년 ‘리뷰’를 통해 ‘거울에 대한 명상’으로 등단한 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로 제1회 문학동네 신인작가상을 수상했다. 1999년에는 ‘당신의 나무’로 현대문학상을 받아 역량있는 신진작가로 문단에 자신의 존재를 분명하게 각인시켰다. 특유의 경쾌한 입담과 유머가 아로새겨진 글도 글이지만, 귀고리에 노랗게 염색한 머리스타일의 겉모습도 ‘튀는’ 작가다. 그는 2월 초 만화가 이우일과 함께 영화 산문집을 출간한 뒤 중순경에는 부인과 과테말라로 떠나 3개월간 머물 계획이다.
▼차세대 주목받는 작가 천운영▼
200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바늘’로 등단한 천운영(31)은 2001년 젊은 작가들의 창작을 지원하는 동아 인산문예창작펠로십과 대산창작기금을 잇달아 받아, 신예 작가로서 가속페달을 힘차게 밟고 있다.
여러 문인들이 차세대 주목할 만한 작가로 추천했다는 이야기를 전하자 천운영은 “부담스럽다. 주목한다는 것은 기대도 많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실망도 많을텐데…”라며 말을 아꼈다. 그러고는 곧 “우리 어머니가 제게 뭐 거짓부렁해 먹고 사는지 모르겠다고 하시는데 그 말씀이 맞는 것 같다”고 덧붙이며 “그래도 문학말고는 생각할 수 있는 일이 없고, 때로 고통스럽고 고달프지만 글쓸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했다.
▼작가들이 좋아하는 작가 박상륭▼
이번 설문에서 문인들이 꼽은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한 명으로 이름이 오른 작가 박상륭. 그의 이름은 일반 독자들에게 매우 낯설게 느껴진다.
그러나 문단에서 박상륭은 주목의 대상일 뿐 아니라 경외의 대상이기도 하다. “젊은 작가들 사이에서 박상륭은 ‘컬트’의 대상으로 자리잡았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 정도. 1999년에 ‘박상륭 문학제’가 열렸는데 생존 인물에 대한 문학제는 문단에서도 유례가 없었다. 이번 설문을 통해 그에 대한 문인들의 높은 평가가 새삼 확인된 셈이다. 그는 문학과 종교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인간 존재와 죽음, 재생의 문제라는 주제를 파고들어 우리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박상륭을 최고의 작가로 추천한 이들은 한결같이 ‘죽음의 한 연구’를 그의 대표작으로 뽑았다. 1975년 발표한 이 작품은 대표적인 난해 소설로 평가된다. 한 평론가는 말했다. “그의 소설은 뚫고 지나가야 할 하나의 두꺼운 벽이고 터널이자 미로이다. 그 숨막힐 듯한 고통을 견뎌내고, 긴 터널을 더듬거리며 통과했을 때 은총처럼 맛보게 되는 경악과 탄성….”
30년간의 캐나다 이민생활을 끝내고 99년 귀국한 그는 캐나다와 한국에 절반씩 머물면서 창작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지난해 7월에는 작품집 ‘잠의 열매를 매단 나무는 뿌리로 꿈을 꾼다’를 출간했다.
▼창비의 筆 문지의 力▼
1970∼80년대에 쌍벽을 이루며 문단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계간지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현재의 ‘문학과사회’)과 두 문예지를 발간해 온 ‘창작과 비평사’ ‘문학과 지성사’가 ‘최고의 문예지’ 및 ‘가장 책을 내고 싶은 출판사’ 부문에 선정돼 두 문예지의 영향력이 세대를 넘어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66년, 1970년에 각각 창간된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은 뚜렷한 자기 색깔을 드러내면서 한국 문학의 젖줄 역할을 해왔다. ‘이미 창비는 세상의 양심을 일깨웠고/잇달아 문지는 열린 인문주의의 고뇌를 뿜어냈다’라는 고은의 시처럼 ‘창비’는 사회 현실문제에 큰 관심을 보였고, ‘문지’는 문학의 순수성과 자유를 옹호하는 입장을 지켜왔다. 둘 다 문학뿐 아니라 역사 철학 및 사회과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지식인들을 필진으로 활용해 한국사회의 이슈를 이끌었다.
‘창작과 비평’의 최원식 편집주간(인하대 교수)은 “출판을 하나의 문화적 사명으로 인식하면서도 시대의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 꾸준히 애써 온 ‘집합적 노력’의 결과”라고 말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창비’와 ‘문지’ 그룹의 동인들은 ‘문단 권력의 실체’라는 집중적인 공격을 받기도 했다.
이 밖에도 문예지 ‘문학동네’ ‘현대문학’ ‘실천문학’ ‘세계의 문학’과 이들을 발간하는 출판사 ‘문학동네’ ‘현대문학사’ ‘실천문학사’ ‘민음사’가 모두 ‘최고의 문예지’와 ‘가장 책을 내고 싶은 출판사’ 부문에 동시 선정돼 문예지와 문학출판사의 밀접한 관계를 읽을 수 있다.
▼설문에 답한 분들(가나다순)▼
▽소설가=구효서 권지예 김연수 김영현 김윤영 김종광 김주영 김지우 문순태 복거일 신경숙 심상대 오수연 윤후명 이만교 이명랑 이윤기 전상국 전성태 전숙희 정도상 정소성 정이현 정찬 한말숙 한정희 함정임 현기영 ▽시인=고형렬 김갑수 김명인 김선우 김용택 김종해 김춘수 김혜순 나희덕 문정희 문태준 박상순 박형준 신현림 안도현 이문재 이산하 이승철 이시영 이윤학 이재무 이해인 정진규 최영철 ▽평론가=권성우 권영민 김동식 김명인 김미현 김성곤 김치수 김화영 남진우 박혜경 신수정 우찬제 이광호 임헌영 정윤수 최성실 최원식 한기 황종연
취재 / 고미석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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