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클리프 리처드 내달 7일 내한 공연

  • 입력 2003년 2월 16일 18시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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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엑세스 엔터테인먼트
사진제공 엑세스 엔터테인먼트
《1969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팬덤 신드롬’을 낳은 클리프 리처드(61)가 34년만에 다시 내한 공연을 갖는다. 당시 결성된 팬클럽 ‘CFC’는 국내 처음이었으며 여성 팬들이 공연장에서 속옷을 던졌다는 소문이 확산돼 기성 세대의 혀를 차게 했다. 그러나 현장에 있었던 권명문씨(53)는 “땀을 닦으라고 손수건을 던진 게 와전된 것”이라고 반박했다. 클리프리처드도 최근 e메일 인터뷰에서 “손수건 등 많은 선물을 받았는데

속옷을 받은 기억은 없다”고 말했다.클리프 리처드 팬클럽‘CFC·www.cliffrichard.co.kr)은 현재도 운영되고 있다. 이메일 인터뷰와 가수 조영남이 회고하는 ‘클리프 리처드 신드롬’을 함께 싣는다. 공연은 3월7일 오후 8시 서울 실내 잠실체육관.

5만∼15만원. 02-3141-4956》

●클리프 리처드 e메일 인터뷰

1969년 내한공연 당시 열창하는 클리프 리처드(왼쪽)와 최근의 모습

―당시 팬들의 열광을 기억하는지.

“크게 놀랐다. 꼭 다시 오려 했다. 왜 지금에야 그들을 다시 만나게 됐는지 안타깝다.”

―여성 팬들이 속옷을 벗어 던졌다고 해서 논란이 됐다. 당시 상황을 설명해달라.

“자세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팬들이 하나같이 노래를 너무 잘 따라불렀던 점은 또렷하다. 속옷은 전혀…”

1969년 공연 당시 신문기사.

―영향을 받은 가수는.

“엘비스다. 그가 내게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한국 무대에서도 엘비스에 대해 경의를 표할 예정이다. 아쉽게도 엘비스를 만난 적은 없다.”

―‘비틀스’ 이전의 영국의 팝 뮤직을 지배했는데.

“나는 ‘비틀스’나 ‘롤링 스톤스’보다 5년 정도 먼저 음악을 시작했다. 그 덕분에 내가 먼저 갈채를 받았다. 이들의 음악은 나와 비슷한 점이 많을 것이다.”

―음악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메시지는.

“가수로서 첫 일은 팬들을 즐겁게 하는(Entertain) 것이다. 그리고 내 노래로 팬들이 메시지를 얻는다면 매우 큰 영광이다.”

―인생의 성공은 클리프 리처드처럼 되는 것이라고 해도 동의하는가.

“나는 매우 만족한다. 지금 이 자리, 내가 무엇이고 누구라는 점 등 모두 만족스럽다.”

허 엽기자 heo@donga.com

▼조영남이 본 1969년 클리프 리처드 첫 내한공연▼

요즘은 인기 가수가 무대에서 노래하는 동안 객석의 관객들이 울며불며 꺅꺅 죽어 넘어가는 광경을 왕왕 볼 수가 있다.

내가 묻겠다.

한국 현대음악사에 최초로 울부짖는 관객을 만들어낸 가수는 누구인가. 남진 나훈아 일까. 아니다. 조용필 서태지일까. 아니다. 그럼 조영남일까. 그건 말도 안된다.

그럼 도대체 누구인가. 그는 곧 내한공연을 펼치는 영국가수 클리프 리처드다. 그는 1995년 영국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기 때문에 이름 앞에 ‘써’(Sir)아니면 이름 뒤에 ‘경’이라는 칭호를 붙여주면 한결 멋져 보인다.

그가 69년 10월 한국의 이화여대 강당에 약간 쉰듯하지만 비단결같은 목소리로 그 유명한 ‘더 여∼영 원스(The Young Ones)’하며 생기발랄한 얼굴을 내밀었을 때 한국은 더 이상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아니었다. 요란법석 시끌벅적한 나라였다.

여대생을 비롯한 수많은 한국의 여성들은 창피고 자존심이고 뭐고 그런 걸 따질 새가 없었다. 그냥 꺅꺅 죽어 넘어갔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개발도상국가가 받아들여야 하는 외래 문명의 하나였다.

클리프 리처드가 한국 땅을 밟을 당시 나를 비롯한 한국의 모든 젊은이들은 그를 맞이할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였다. 그때는 지금과 사뭇 달랐다. 그러니까 요즘은 찾기 어렵지만, 당시는 축음기 혹은 전축을 가진 집이 극히 드물던 때였다. 거의 모든 음악은 라디오와 음악 다방실에서 틀어주는 LP판의 엉성한 음향을 좋아라 감상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오죽하면 서울 시내 곳곳에 ‘쎄시봉’이나 ‘디쉐너’같은 이른바 음악 감상실이라고 불리는 곳이 따로 있었을까.

당시 모든 라디오나 다방 음악실은 클리프 리처드의 노래로 도배하고 있었다. 지금도 거의 모든 축하자리에서 울려 퍼지는 ‘콘그레츄레이션(Congraturation)’이라는 노래도 이때부터 우리에게 일상 생활로 굳어진 것이다. 가령 그 노래를 클리프 리처드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들을 경우는 단번에 어색해진다.

게다가 그가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영 원스’를 비롯한 여러 편의 영화가 국내 영화관을 석권하고 있을 때, 그가 우리 앞에 불쑥 나타났으니 우리네 처녀 군단이 울며불며 자지러진 것은 당연했다. 단지 그런 열풍이 사실상 그보다 더 강력한 ‘비틀스’나 미국의 엘비스 프레슬리에 앞서 불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클리프 리처드의 열풍이 서서히 익어가던 70년대초 나도 빌리 그레이엄 전도단을 따라 성가대 가수의 자격으로 미국을 건너 갔다가 또한번 깜짝 놀랐다. 서구 가스펠(복음성가) 음악계에 이미 그가 우뚝 서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사람보다 대여섯살 아래지만 어쩔 수 없이 그의 뒤를 따른다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는 요즘도 영국 왕실에서 주최하는 연례 최고 음악회에 폴 매카트니, 엘튼 존, 에릭 클랩튼 함께 여전히 해맑은 모습으로 맨 앞자리를 장식하곤 한다. 그가 장장 34년만에 우리 곁을 다시 찾아온다니, 나는 감회에 젖지 않을 수 없다.

가수·방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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