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작화랑 대표-청각장애 아들, ‘雲甫라는 희망’의 알찬 결실

  • 입력 2003년 2월 18일 18시 01분


청각장애 조각가 신일수씨(오른쪽)와 어머니인 청작화랑 대표 손성례씨. 새로 이전한 청작화랑 개관기념식에서 어머니 손씨는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흐르는 듯 아들손을 꼭 잡았다. 김미옥기자
청각장애 조각가 신일수씨(오른쪽)와 어머니인 청작화랑 대표 손성례씨. 새로 이전한 청작화랑 개관기념식에서 어머니 손씨는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흐르는 듯 아들손을 꼭 잡았다. 김미옥기자

훤칠한 키에 잘 생긴 이목구비. 스스럼없이 말을 걸었는데 알아 들을 수 없는 중얼거림이 돌아온다. ‘참, 신일수씨(30)는 청각장애였지’. 어머니 손성례(57)씨는 아들이 지난해 10월 인공와우 수술을 받은 뒤 처음으로 바깥 소리를 듣고 있다고 전했다.

14일 오후 다섯시. 이 날은 손씨가 경영하는 청작(靑雀) 화랑 이전 기념식 날이었다. 16년 전 논현동 골목길에 그것도 건물 6층임대라는 불리한 입지를 극복하고 화랑을 열었던 그가 미술계가 IMF 외환 위기 시절보다 더 어렵다는 요즘, 강남 요지로 옮겨 화랑을 확장 이전 한 것이 화제가 됐다. 비록 지하1층 임대이긴 하지만, 평수(60평)도 늘었고 주차장도 생겼다.

이날 주인공은 아들 신씨도 함께였다. 석사 학위를 마친 그가 새 학기부터 모교인 서울시립대 환경조소과에서 강의를 시작하게 된 것. 청각 장애인으로서 미술대학 강단에 선다는 것 역시 남다른 일이었다.

모자(母子)의 주변에는 빛이 났다. 특별한 유대감을 표현하지 않아도 두 사람 사이 정(情)이 분위기를 따뜻하게 만들었다. 손씨는 이날, 장애 아들을 둔 어머니로서, 화랑주인으로서 쉼없이 달려 온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흐르는 듯 여러번 심호흡을 했다.

아들은 난산으로 날 때부터 맹아였다. 이후부터 시작된 손씨 가족의 삶은 투쟁의 연속이었다. 전문대학 교수인 남편 월급으로는 교육비 대기도 힘들었지만 손씨는 생활비를 줄이고 줄이면서 아이 교육에 매달렸다.

들을 수 없으니 말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 손씨는 우선 5∼6세 아이들이 다니는 한국구화학교에 갓난 아들을 입학시켰고 온갖 단어를 입 모양으로 수십번씩 되풀이 해 머릿 속에 입력시켰다. 초등학교부터 대학원까지 일수씨는 보통 사람들과 똑같은 과정을 밟았다. 학교를 다닐 때마다 상위권 성적을 유지 해 ‘듣지 못하는데도 이렇게 공부를 잘 하느냐’며 교사와 친구들을 놀라게 했다.

하루는 초등학교 5학년때 운보 김기창 화백의 신문 기사를 오려 오더니 ‘그림을 배우겠다’고 했다. 동향인 청주인데다 가톨릭인에, 청각장애인으로서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한 김화백은 아들의 우상이 됐다.

손씨는 아들이 화실에서 그림을 배우면 함께 그림 공부를 했다. 아들의 진로에 도움될 만한 일을 찾기 시작했고 그렇게 시작한 것이 화랑 일. 화랑일이라는 것이 만만치 않다는 주변의 권유도 있었지만 아들 키우는 일처럼 매달리면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택한 것은 정직과 신용. 작가들을 존중하고 허튼 말 안하는 진실함을 보여줬고 작품이 팔리면 1주일 이내에 화가통장에 입금시켰다. 보통 한달이 걸리는 관행을 깬 것. 이렇게 16년을 하다 보니, 작가들은 청작화랑 전시라면 일단 믿고 맡긴다. 화랑협회 재무담당(현직)을 하면서 보여준 똑 부러진 살림살이는 이미 미술계에 정평이 나 있다.

일수씨는 5수 끝에 상명대 조소과에 입학했다. 성적은 순위에 들었지만 번번이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입학이 거부되면서 조각가의 꿈을 접으려 하기도 했지만 뚝심과 의지로 버텼다. 내친 김에 서울시립대 대학원에 입학했고 이번에 교단에 서게 된 것.

일수씨의 전공은 돌조각. 미술계에서는 3D작업중의 하나이지만 일수씨는 마음 속에 응어리가 많아서인지 돌을 깨고 쪼면 잡념이 하나도 없는 내면 세계의 해방을 느낀다고 했다.

견실한 화랑대표로서 또 다른 길을 시작하는 손씨와 장애를 딛고 조각가와 교육자로서 새 길을 시작하는 아들 일수씨에게 금요일 최악의 교통난을 뚫고 참석한 미술계 관계자 30여명은 아낌없는 격려와 박수를 보냈다.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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