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겨울은 비가 흩뿌리는 날이 많다. 가는 비가 잠깐씩 그치고 또 흩뿌리며 이어지는 날이면 ‘가슴에 품을 애인은 없어도 반드시 우산만은 꼭 품고 다녀야 한다’는 한 선배 파리지앵의 푸념을 뇌까리게 된다.
필자가 출판계 지인(知人)의 제의로 세계 소설계의 거장과 잊을 수 없는 만남을 갖게 된 것도 이렇듯 흐린 겨울날이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4)’ ‘정체성(1997)’ 등의 소설로 한국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킨, 체코 출신 작가 밀란 쿤데라를 최근 만나게 된 것이다.
필자의 역할은 그의 집을 방문하는 출판사 직원을 도와 대화 분위기를 부드럽게 해주는 정도였다. 주제넘게 문학 이론을 논할 생각도 없었고, 또 그의 작품 속에서 애써 개인적 삶의 흔적을 찾아가며 이것저것 캐묻는 자리를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지난 10년간 소설가를 작품 밖의 모습으로만 포장해 버릴 수 있는 ‘인터뷰하기’를 싫어한다고 밝혀오지 않았던가.
만남은 파리 한복판 그의 아파트에서 이루어졌다. 작은 정원으로 막힌 골목 끝 그의 집은 주변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있었다. 벨을 누르자 쿤데라의 아내 베라가 내려와 문을 열어주었다.
우리는 서가로 장식된 복도를 지나 거실로 안내됐다. 추위를 느낀 필자가 포도주를 부탁하자 베라는 부르고뉴산 적포도주를 새로 따 내왔다. 묵직한 향이 병 밖으로 퍼져나가기도 전에 큰 키의 쿤데라가 구부정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마치 부르고뉴의 향에 취해 따라나온 사람처럼 그는 앉자마자 앞에 놓인 진홍빛 부르고뉴를 따르고 목을 적신다.
따라온 이유를 간단히 설명했는데도 쿤데라는 필자를 한국에 소개될 다음 작품의 번역자쯤으로 여기는 눈치였다. 그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많은 질문을 해댔다. 한국어는 어느 언어에 가까운지, 한자와 한글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그는 호기심 가득한 어린아이의 눈을 간직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그가 어떻게 모국어인 체코어를 두고 프랑스어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는지 궁금했다. 그는 81년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 뒤 86년부터 프랑스어로 글을 쓰는 ‘체코 출신 프랑스 작가’가 되었기 때문이다. 첫 프랑스어 소설 ‘불멸’을 발표한 것이 88년, 59세 때의 일이니 한참 늦은 나이에 외국어로 글쓰기를 시작한 것이다. 어려서부터 프랑스어에 익숙했고 프랑스어 번역본이 체코어 원본과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고까지 선언한 그이지만, 어눌한 프랑스어 말투에서 ‘프랑스어 글쓰기’가 치열한 생존의 선택이었음을 어림해 본다. 그러나 고단한 망명의 길이 영원한 족쇄로 채워지기를 거부하고 이를 또 다른 창작의 기회로 삼고자 했던 그에게 ‘프랑스어 글쓰기’는 위대한 작가 정신의 발로(發露)나 다름없다.
필자는 그와 얘기 중 4월3일 프랑스어판 ‘향수’가 나온다는 말을 듣고 메모지 한구석에 슬며시 적어 놓았다. ‘향수’는 2000년 4월 스페인과 남미에서 처음 출간되었다.
그해 겨울에는 한국에서도 베스트셀러에 올랐지만 프랑스어로 쓰여진 이 소설을 정작 프랑스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어떤 이는 소설 ‘느림’과 ‘정체성’에 대한 프랑스 비평가들의 혹평 때문이라고도 했고, 출판사와의 불화 때문이라는 추측도 있었지만, 한 비평가의 말대로 “75년 공산독재 정권을 피해 프랑스로 피신한 망명작가가 자신의 내밀한 상처를 담은 이 소설을 가장 가까운 프랑스 독자들에게 선뜻 내보이기란 오히려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해석이 훨씬 와 닿는다.
부르고뉴가 바닥을 보일 무렵에서야 우리의 만남이 예정된 시간을 훨씬 지나고 있음을 깨달았다.
쿤데라는 어느덧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편안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작별인사를 나눈 뒤에도 맡겨놓은 외투를 가져다 줄 기색이 없었다. 외투를 달라고 하자, 허허 웃으면서 자신들이 외투를 사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이것이라며 재치있게 넘어간다.
이번에는 쿤데라가 우리를 정문까지 배웅했다. 짧은 만남을 통해 얻은 쿤데라의 이미지가 그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오랫동안 마음 한구석에서 메아리칠 것 같았다.
임준서 프랑스 루앙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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