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까지만 유효합니다.” 그는 ‘황동규/인문대학 영어영문학과 교수/서울대’라고 새겨진 명함을 건네며 말했다. 올해 8월이면 정년퇴임을 맞는 까닭이다.
“퇴임하면 2, 3개월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생각인데요. 이런 얘기를 했더니 누가 ‘시도 안 쓸 거냐’고 묻는데, 시를 안 쓰면 바로 뭔가를 하는 것이지요. 시는 당연한 것이니까요.”
‘시인은 시가 타는 심지,/ 허나 촛농이 없다면 그게 무엇이겠는가?/ 어느 순간 한 삶의 초가 일시에 촛농이 된다면?/ 할하라,/ 할하라, 아직 꺼지지 않은 심지를 향해.’(‘풀이 무성한 좁은 길에서’)
―신작 시집에 수록된 ‘시인의 말’이 제목과 같은,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라는 단 한 줄뿐이네요.
“줄이고 줄이다보니 한 줄이 됐어요.(웃음) 기댄다는 것은 의지한다는 것이지요. 삶 자체는 필연과 우연, 둘 다에 의지할 수밖에 없으니까….”
‘우연에…’는 그의 12번째 시집. “‘외계인’(1997)을 낼 무렵 귀 수술을 받았어요. 30여년 동안 키워온 병이었는데, 수술 후 원기를 찾았다고 할까. 그 다음에 낸 ‘버클리풍의 사랑노래’(2000)와 이번 시집이 나로서는 이전보다 힘이 더 있는 시집이에요.”
시집 전체를 관류하며 고르게 울리는 묵직함이 그 ‘힘’의 증거. 그의 ‘힘’은 연륜에 기댄 설교로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 대가연하지 않는 시인의 목소리는 솔직하고 겸손하다.
“예술은 곧 삶에 대한 질문이거든요. 나는 질문을 계속하고 싶어요. 앞으로 시집 한 권은 더 견딜 수 있을 것 같아요. 날 지킬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이지요. 주변 사람들에게 내 시에서 힘이 떨어지면 꼭 이야기해달라고 부탁도 해뒀습니다.”(웃음)
―시 ‘홀로움은 환해진 외로움이니’ 등에 아버지(황순원)를 담으셨는데요. 평소 인터뷰에서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편이시지요.
“음악이나 미술 분야와 달리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문학을 하는 경우는 아주 드뭅니다. 문학은 모든 예술 장르 가운데 체험이 가장 중요한 분야지요. 체험을 공유한 부자(父子)는 둘 다 설자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나는 아버지와 공유한 체험을 반복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을 뿐이에요. ‘홀로움…’은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신 지 한두달 뒤에 쓴 시로, 예외적이지요.”
―‘즐거운 편지’에 이어 이번에는 ‘쨍한 사랑노래’ ‘더 쨍한 사랑노래’로 사랑을 읊으셨습니다. 사랑이란 어떤 것인가요.
“나는 대상이 있는 사랑보다 사랑 그 자체를 다룬 시를 썼어요. 특별하게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랑이란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결혼상대는 비슷한 사람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해줄 수 있겠군요.”(웃음)
그는 “‘연애시’를 쓰고서는 한 번도 고치지 않았다”며 “사랑이 내 서정의 기본”이라고 말했다.
―이번 시집에도 ‘풀이 무성한…’ 등 3편의 긴 시를 실으셨네요.
“지금까지 긴 시 20여편을 남긴 것이 우리나라 시단에 형식면에서 가장 기여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단에서 짧은 시가 주를 이루지만 긴 시를 통해 삶을 입체적으로 조명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긴 시는 쓸만하고 또 도전적이에요. 전체적인 균형을 맞춰야 하는데, 이것이 힘들기 때문이지요. 사실 힘들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는 것은 예술가의 기본 전제랍니다. 또 가능하다면 마지막까지.”
▼쨍한 사랑노래 ▼
게처럼 꽉 물고 놓지 않으려는 마음을
게 발처럼 뚝뚝 끊어버리고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조용히, 방금 스쳐간 구름보다도 조용히,
마음 비우고가 아니라
그냥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저물녘, 마음속 흐르던 강물들 서로 얽혀
온 길 갈 길 잃고 헤맬 때
어떤 강물은 가슴 답답해 둔치에 기어올랐다가
할 수 없이 흘러내린다.
그 흘러내린 자리를
마음 사라진 자리로 삼고 싶다.
내림 줄 쳐진 시간 본 적이 있는가?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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