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시대에 철학과 예술의 사이는 그리 원만하지 못했다. 그 시대의 대표적 철학자인 플라톤은 예술이 이성보다는 정감에 호소함으로써 진정한 세계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만든다고 비판했다. 플라톤은 예술에 대한 검열, 나아가 폐지를 주장하기도 했다. 그런데 플라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예술은 번성했다. 비판과 경쟁이 있을 때 개인이나 국가가 발전하듯이 그리스 예술도 철학의 따가운 비판을 자양분으로 성장한 것은 아닐까.
요즈음 문화예술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목소리가 높다. 많은 철학자들이 문화예술에 관심을 돌리고 있다. 특히 새로운 문화예술의 영역이 발전하면서 영상 철학, 디지털 철학, 사이버 철학, 매체 철학 등과 같은 명칭이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 이런 명칭의 철학들을 시류의 철학으로 폄훼하는 입장에도 타당성은 있지만 새로운 문화예술의 번성을 일구어낼 비판자로 육성하는 일이 더 생산적이다.
이 책도 디자인에 대한 철학적 비판의 결과물이다. 저자는 철학자의 비판적 시선으로 디자인이라는 문화예술의 신주류를 들여다본다. 에세이풍인 그의 글들은 디자인과 관련된 기초적 논의를 출발로 삼는다.
이 책의 1부에서는 디자인이라는 단어의 의미, 디자이너의 역할, 디자이너의 윤리 등이 다뤄진다. 2부에서 이 책의 마지막인 4부까지는 일상적 디자인들에 대한 구체적 해석이 중심을 차지한다. 지렛대, 가면, 우산, 텐트, 낙하산, 타자기 등 미시적 디자인에서부터 미사일, 공장, 벽, 도시 등 거시적 디자인까지 여러 디자인들이 해석의 대상이 된다.
저자는 이런 디자인들의 본래적 의미뿐만 아니라 역사적 의미도 읽어낸다. 특히 오늘날의 디지털 문화가 이들 디자인에 끼치는 영향을 주시한다.
디자인에 관한 저자의 글은 때로는 롤랑 바르트의 글을 연상시킨다. 바르트는 광고, 사진, 영화 등의 이미지에 대한 분석을 통해 그 이미지 속에 길들여져 있는 문화적 신화를 폭로하려 했다. 플루서의 글도 디자인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을 “지렛대가 퉁겨나가듯” 또는 “타자기가 덜거덕거리듯” 흔들어 놓는다.
그러나 기호학이라는 바르트의 방법에 비견될 만한 해석의 방법을 플루서는 지니고 있지 못하다. 굳이 찾자면, 자유로운 유랑의 방법. 그는 디자인의 의미를 자유로이 유랑하듯 엮어낸다. 그의 유랑적 시선 덕분에 우산-텐트-낙하산-돛-연-글라이더-양탄자-스크린-텔레비전 등이 바람 불 듯 엮어진다. 역사적, 정치적 곡절 때문에 체코-영국-브라질-프랑스로 유랑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삶이 영향을 끼친 탓일까.
그렇지만 유랑이 어디 쉬운 일인가. 유랑자를 좇는 일은 더더욱 힘들다. 유랑이 주는 감흥과 영감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은 쉽게 읽히지 못한다. 철학과 예술의 만남이 논리적 창의성과 감성적 이성을 갖추어야 할 터이다.
김진엽 홍익대 교수·미학 jinyupk7@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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