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친구의 집에서 당시 소련의 ‘레드 아미 코러스’ 음반을 함께 듣고 있던 중 친구가 한 말이다.
“왜?”
“소련 노래를 들으면 ‘기관’에 잡혀가는 줄 알았거든. 아버지가 일본 연수를 마치기 직전 판을 사셨는데, 서울에 들어오실 때도 속옷으로 겹겹이 싼 뒤 트렁크 밑바닥에 넣고 마음을 졸이셨대.”
“그럼, 언제부터 이렇게 크게 틀 수 있게 됐는데?”
“언젠가 FM라디오방송에서 이 노래들이 나오는 걸 듣고 나서.”
둘은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금기란 신비롭다. 당시만 해도 고르바초프가 한참 뜨던 때였지만, 땅땅 얼어붙은 벌판에서 울려오는 듯한 육중한 합창을 들으면서 우리는 ‘철의 장막’ 저편 사람들이 도대체 어떻게 살고 있을까, 갖은 상상을 펼쳤고 알 수 없이 들떠 있었다. 그때 누구는 그곳이 지옥일 거라고 했고 누구는 천국일 거라고 했다. 중간은 없었다.
입춘도 이미 지났으니 ‘뒷북치는’ 느낌이 있지만 어쨌거나 러시아 민요는 겨울이 제격이다. ‘검은 눈, 불타는 눈, 어여쁜 눈, 뜨거움에 찼네. 사랑하오! 그러나 무섭소….’
민속 현악기인 발랄라이카의 트레몰로(같은 음을 연속해서 치는 연주법)가 ‘뜨르르르’ 울려 퍼지고, 그윽한 남성 저음이 탄식하는 듯한 가락을 울리면 어느새 자작나무숲에 눈발이 날리는 듯한 환상에 젖게 된다.
베이스 디미테르 페트코프는 1969년 일본 여행 중 도시바 스튜디오에서 14곡의 러시아 민요를 녹음했다. 오늘날 일본 EMI에서 ‘이스트월드’라는 레이블의 CD로 나와있는 이 음반은 70, 80년대 제법 방송을 탔다. 재미있는 점은 페트코프가 러시아인이 아니라 불가리아인이라는 점. 반주악단도 ‘앙상블 발칸’이라고 되어 있으니 불가리아의 악단인 듯하다.
같은 슬라브 민족이기는 하지만, 불가리아는 그리스에 바로 붙어있는 ‘남쪽나라’이니 ‘동토’와는 관계가 있을 리 없다. 그러나 깊고 그윽한 페트코프의 음성은 ‘카추샤’ ‘볼가강의 뱃노래’ ‘스텐카라친’ 등 익숙한 러시아 민요들에 그려 맞춘 듯 들어맞는다. 너무 매끈하게 뽑아낸 듯한 불만이 남기도 하지만, 녹음도 60년대의 것으로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선명하다.
러시아 민요의 최근 디지털 명반으로는 인기 바리톤 드미트리 흐보로스토프스키의 것(필립스·1991 녹음)을 빼놓을 수 없다. 야수의 포효와도 같이 볼륨이 좋은 흐보로스토프스키의 야성적인 음성이 ‘섹스 어필’에 가까운 짜릿함을 안겨다준다. 페트코프의 음반과 공통되는 곡은 ‘검은 눈동자’뿐. 그 밖에 ‘테트리스’ 배경음악으로도 익숙한 ‘등짐장수’ 등이 실렸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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