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에 여성 장관이 대거 기용됐다. 과학계도 요즘 여성의 활약이 눈부시다. 한국에도 ‘여성의 시대’가 싹트고 있다. 그러나 육아 문제, 남녀 차별 등 여성에게 놓여진 장벽도 아직 많다. 동아사이언스와 한국과학재단은 최근 여성 과학자와 이공계 여학생, 이공계 자제를 둔 어머니를 초청해 여성 과학자와 한국의 교육 현실에 대해 솔직한 이야기를 나눴다.
▶참석자:지난해 말 ‘제2회 여성과학기술자상’을 받은 김영중 서울대 약대 교수, 최순자 인하대 화공생명공학부 교수, 오세화 한국화학연구원 책임연구원을 비롯해 박기영(서울대 화학과 4학년·1999 화학국제올림피아드 은메달), 최서현(서울대 수학과 3학년·2000 수학국제올림피아드 금메달), 정혜리(포항공대 물리학과 1학년·과학기술부 와이즈 프로그램 참여), 정지은양(고려대 재료공학과 1학년·과기부 와이즈 프로그램 참여), 학부모 이지승, 노복순씨.》
▽정혜리=요즘 고교 이과반 학생 절반은 의대와 약대에 진학하기를 원한다. 신문에서 ‘이공계 위기’를 하도 많이 떠들고, 내가 여자니까 이공계 나와서 뭐 할까 고민도 많이 했다. 그러나 적성이 아닌데 돈만 보고 가면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았다. 정 의대를 가고 싶으면 대학을 졸업하고 의학대학원에 가면 되지 않나. 불안하지만 용기를 갖고 이공계에 갔다.
▽김영중=좋은 생각이다. 미국에서는 의사가 되려면 대학에서 생물 화학을 전공한 다음에 간다.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도 있지만 연구에 전념하는 의사가 되는 것도 좋지 않나.
▽정지은=아직도 여자가 공대 들어가는 걸 이상하게 보는 것이 현실이다. 나도 공대 가겠다고 하자 주위에서 ‘여자가 공대에서 어떻게 살아남느냐’고 반대하더라.
▽박기영=3년 전 내가 대학 들어올 때도 똑같았다. 처음에는 화학공학과에 원서를 내려고 했는데 하루 전에 화학과로 바꿨다. 주위에서 여자가 웬 화공과냐고 말리더라. 재미있는 것은 아버지도 화공과를 나왔다. 어렸을 때 과학자에 대한 동경은 없었지만 집안 분위기가 워낙 과학을 강조하는 편이고 수학 과학을 잘 해 이공계를 선택하게 됐다.
▽정지은=그러나 외환위기 때 연구원이 제일 먼저 잘렸다는 말을 들으면 불안하다.
▽오세화=이공계 위기의 본질은 사회가 과학자를 도구로 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자라는 직업에 대해 불안해하지는 말라. 재능 있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 하면 그 분야에서 뛰어나게 되고 충분히 먹고 산다. 나도 출연 연구소에 있지만 교수보다 봉급이 적지 않다.
▽최순자=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여성도 직업을 갖고 경제적으로 독립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고교 때 제일 좋아한 것은 철학이었는데 직업을 갖기에는 이공계가 더 나아 보였다. 또 여자가 드문 공대에 가면 당장 고생은 하겠지만 미래에 더 경쟁력을 가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교수도 됐고 ‘여성과학기술자상’도 받았고, 내 선택이 미래를 내다본 것 같다.
▽최서현=어릴 때부터 수학을 좋아했고, 국제대회에 나가서 상도 받다 보니 자연스럽게 수학과에 오게 됐다. 1학년 때는 내가 꼭 수학을 해야 하나 했는데 지금은 할 것도 많고 재미도 있다. 그러나 주위에서 역할 모델이 될 만한 여성 과학자를 만나기 힘들어 아쉽다.
▽이지승=여기 와서 여러분들 이야기를 들으니 내 아이 생각이 난다. 내 아이는 과학고를 나와 외국 대학에 갔다. 아이가 중학교 2학년 때 물리학자가 되고 싶다고 통보하듯이 말했다. 그때부터 학원을 보냈다. 다른 것은 내가 도와주겠는데 경시대회는 안되겠더라. 물리 공부 할 때 보면 아이가 정말 행복해 보인다. 잘 선택한 것 같다.
▽노복순=우리 아이는 민족사관고 2학년인데 생명과학을 하고 싶다고 해서 고민이다. 난 의대를 갔으면 좋겠다. 여자이기 때문에 결혼 문제도 걸리고 연구원이 의사만큼 생활이 보장되는지 걱정이다.
▽최순자=어머니가 아이를 너무 인형처럼 만들려는 것은 아닐까. 지난 입학철에 30여분의 부모님을 만난 기억이 난다. 우리 부모님들은 자식에 대해 너무 욕심이 많다. 월드컵이나 이번 선거에서도 나타났지만 아이들은 자신의 길을 분명히 하고 있다. 부모들은 한번 믿고 지켜보자.
▽김영중=부모로서 딸이 일과 결혼 사이에서 겪을 갈등을 걱정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여성 과학자라고 결혼을 미뤄야 공부가 되는 것은 아니다. 힘들어 죽겠다 하면서 어려움을 극복하는 희열도 크다. 요즘은 남자들도 잘 도와준다. 그러나 육아 문제는 정부가 도와줘야 한다. 나도 공부하느라 아주 늦은 나이에 애를 낳았는데 정말 힘들었다.
▽최서현=공부하면서 가끔 수학자 전기를 읽는데 추모사에 ‘여성으로서 천재적인 머리를 지녔다’는 말이 나와 기분이 나빴다. 그냥 똑똑하면 됐지 왜 여자를 갖다 붙이나. 나도 그런 말 듣기 싫다. 수학과에 여자가 적은 것도 불만이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대개 남자다. 크게 문제를 느끼지는 않지만 인간 관계에 지장이 있는 게 사실이다.
▽박기영=과학자도 인간이고, 객관적인 과학조차 사회의 이데올로기와 무관할 수 없다. 성차별도 마찬가지다. 국제올림피아드에 나갈 때 ‘이번에 상 못 받으면 다음에 여자 안 뽑는다’는 말을 듣고 화가 났다. 여교수와 좌담회를 연 적이 있는데 남자 교수들이 자신을 왕따시킨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여자들이 공부는 더 열심히 하고 학점도 좋지만 정보는 부족하다.
▽오세화=연구소에서도 같은 직급이면 여자 연구원이 성과가 더 좋은 편이다.
▽정지은=선배에게 이공계 대학의 여성은 3종류가 있다고 들었다. 공주, 남자, 왕따다. 여성적인 매력을 가꿔 남성들에게 인기가 많거나, 성격이나 행동이 남자처럼 변하거나 그도 아니면 친구도 없다고 한다. 남자들도 여자 동기한테 “쟤 공주야, 쟤는 여자가 아냐”라고 한다. 여자가 적고 남자만 많아서 그럴까. 다행히 우리 과는 4명 중 한 명은 여자다.
▽박기영=그 점과 관련해 지은이나 혜리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 여자 신입생에게 남자 선배나 동기가 참 잘해 준다. 공주가 된 듯한 느낌이 들 것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평생 도움이 될 사람들은 결국 여자 선후배와 동기다. 남자들과도 잘 지내야 하지만 여자들과의 우정도 쌓아야 한다. 연애하다 보면 우정을 놓치고 3, 4학년 돼서 후회할 때가 참 많다.
▽최순자=사회 분위기가 많이 개선되고 있으므로 함께 노력해 보자. 공주, 남자, 왕따 아니고도 멋진 여자가 될 수 있다. 학생들을 가르쳐 보면 여자에게 부족한 것이 대인관계라는 생각이 든다. 대인관계를 개선하려면 우리 스스로 남자들과 서로 다르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남자가 아니라 같은 사람이 돼야 한다.
▽김영중=나 역시 여자 후배들 중에 힘들 때는 여자를 내세워 피하려고 하는 사람을 볼 때가 있다. 난 지금까지 ‘여성 과학자다’하고 내세운 적도 없고 대우를 요구한 적도 없다. 여성일수록 자기 자신에게 엄격해야 된다. 사회에는 여자를 못미더워 하는 분위기가 분명 있다. 그걸 이겨내야 한다. 인내심이 필요하다.
▽오세화=전 산업자원부 장관이 ‘산업 4강이 목표’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산업 4강 되려면 우리 기술이 있어야 한다. 외국 공장 유치해서는 절대로 산업 4강 못된다. 우리 기술 개발하려면 남녀 구별 없이 창의적인 과학자를 길러야 한다. 모든 우수한 인재를 활용해야 한다.
▽최순자=맞다.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가 되려면 여성의 참여가 더 활발해야 한다. 잘 살려면 남자가 여자를 도와줘야 한다. 과학도 마찬가지다. 특히 현대 과학은 점점 더 치밀해지고 있다. 섬세한 성격을 갖고 있는 여성 과학자가 미래의 과학을 이끌 수 있다. ‘여성이니까’하고 뒷걸음치지 말고 남성과 함께 사회의 일원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정지은=오늘 선배 과학자들을 만나 보니 여성 과학자로서 자부심이 참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대학에 입학했는데 평소에 신문에서 탄소나노튜브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주로 남자 과학자가 나왔는데 여성으로서 이 분야에 한번 도전해 보고 싶다.
▽김영중=25년 전 서울대 약대에 부임했을 때 첫 여교수였다. 최근에야 여교수가 한 명 들어왔다. 선배 과학자들은 정말 황무지를 개척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힘든 부분도 있겠지만 여러분에게는 충분히 기회가 있다. 자신의 꿈을 잘 살려 부디 멋진 과학자로 성장하기 바란다.
정리=김상연 동아사이언스기자 dre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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