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아내가 준비하는 ‘조각가 김광진 유작전’

  • 입력 2003년 3월 4일 21시 04분


'고향바다' 38×23×111㎝ 1990.
'고향바다' 38×23×111㎝ 1990.
한국 구상 조각계에서 독특한 영역을 일구었던 조각가 김광진(1946∼2001). 쉰 여섯 나이에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타계한 그의 유작전을 준비하는 아내 배순자(56)씨를 만나며 기자는 ‘예술가의 아내’ 이전에 ‘여자로서의 삶’에 관심이 갔다.

결혼생활 만 29년 동안 상대의 호칭조차 따뜻하게 불러본 일이 없고 하루에 ‘응’ ‘안돼’ ‘아니’ ‘해’ 네 마디 외에는 입을 열지 않았던 남편. 연중무휴로 학교(진주교대) 작업실로 출근해 밥 먹으러, 잠만 자러 집에 왔던 남편. 동향(목포)에 대학 동기(홍익대 조소과 65학번)였던 남편은 세 가지 결혼조건을 내세웠다고 한다. 동사무소 안간다, 은행 안간다, 이불 안갠다.

“세상사에 개의치 않고 내 길을 가겠다는 고집이었지요. 작가 정신이 분명하고 작품이 정말 좋았어요. 그 분과 살려면 보통 여자로서의 삶은 포기해야 한다, 남편이나 아버지 역할을 기대해선 안된다, 각오를 단단히 했었지요.” (배씨는 동갑내기였던 남편을 지금도 ‘김선생’ ‘그 분’으로 부른다.)

막상 결혼 생활은 쉽지 않았다고 했다. 경제적으로도 힘들었고 워낙 말이 없다가 맘에 안드는 일이 있으면 불같이 화를 내는 성격을 맞추느라 애도 많이 썼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의 이런 말은 남편에 대한 그저 가벼운 투정이었다. 남편을 추억하는 아내의 눈빛과 표정은 가슴 밑바닥에서 우러 나오는 사랑과 존경 그대로였다. 그녀는 “아직도 그 사람이 연극을 하고 있는 것 같다”면서 2년이나 이어지고 있는 남편의 부재를 실감하지 못한다는 표정이었다.

조각가 故김광진씨의 생전모습

“지구상에서 그런 사람 다시 없을 거에요. 말과 행동이 한결같고 늘 작품에 대해 고민했으니까. 딸들도 49재 때 ‘다음 세상에서는 아버지를 스승으로 만나고 싶다’ 하대요. 남편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예술가였어요. 때로 힘들었다 느꼈었던 결혼 생활도 따지고 보면, 제 탓이지요. 원래 각오했던 것을 잊고 나태해져서 욕심이 생긴 거니까.”

‘念起念滅卽生死’.

김광진이 세상을 등진 후 그의 연구실을 정리하면서 발견했다는 이 메모는 불경에 나오는 말이다. ‘생각이 일어나는 것은 살아 있음이요, 생각이 없어지는 것은 곧 죽음’이라는 이 뜻은 생전에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사유하는’ 인간이었나 하는 것을 짐작케 한다. 그의 조각에는 이런 그의 혼이 그대로 배어 있다.

서울 강서구 화곡동 20평짜리 그의 낡은 집에는 학교에서 운반해온 70여점의 작품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손질에 여념이 없던 배씨는 “김선생 작품을 사람들에게 보일 수 있어 얼마나 좋은 지 모르겠다”며 달뜬 목소리로 작품 하나하나에 대한 설명을 했다.

김광진의 조각은 우선 친근하다. 조각하면 떠오르는 우람한 모뉴멘트나 예쁜 장식용 물건이 아니다. 8등신 인체가 아니라 6.5 등신 우리 모습 그대로이며 인물들도 거리에서, 차 안에서, 길에서 흔히 만나는 사람들이다. 정장을 한 중년 남자, 피곤한 샐러리맨, 처진 어깨의 노동자….

그런데 그들은 비틀거리며 서성이고 있다. 차마 대면하고 싶지 않은 우리의 지친 모습이다. 그의 작품을 보면서 선뜻 두려움이 이는 것은 흙 덩어리가 주는 무거움과 함께 때로 뛰쳐 나오고 싶은 우리의 일상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을 보면, 조각도 하나의 훌륭한 언어일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존재와 생명을 철학적으로 성찰’(임두빈·미술평론가) 한 치열한 예술가의 삶과 혼 앞에서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문득 삶이 힘들다 해도 악착같이 살아야지 하는 오기가 생긴다. 그의 조각이 주는 에너지는 바로 그것이었다.

한국 구상 조각계에서 독특한 영역을 일구다 쉰 여섯 나이에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타계한 남편(김광진)의 유작전을 준비하는 아내 배순자씨. 한사코 얼굴찍기를 마다하는 그녀를 겨우 설득했다. 배씨는 남편의 분신과도 같은 조각작품들을 어루만지며 2년째 이어지는 남편의 부재가 아직은 실감나지 않는다고 했다. 박주일기자

5∼11일 서울 인사 갤러리에서 그의 못다 핀 예술혼을 묻어두기 아까워했던 홍익대 선후배들이 마련한 유작전이 열린다. 02-735-2655∼6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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