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주빈은 조지 파타키 뉴욕주지사도, 마이클 블룸버그 뉴욕시장도 아니었다. 단호한 어조로 연설을 시작한 이들은 파티에서처럼 유쾌한 목소리로 대니얼 리베스킨드(56)를 소개하는 역할에 만족했다. 독일 베를린에서 뛰고 있는 건축가 리베스킨드씨가 이날의 주인공이었다.
회색머리에 작은 키, 검은색 조르조 아르마니 양복, 옆으로 길게 벌어진 네모난 검정 안경이 멀리서도 그를 알아보게 하는 트레이드마크다. 좀 더 가까이 가면 역시 검은색인 카우보이 사슴가죽 부츠(몬태나주 보즈맨의 카터스 코블러 숍 제품)도 보인다. 설계사무소나 강연장, 파티장에서도 그는 늘 그런 차림이다. 행사장에 함께 온 부인 니나(54)는 “아마 아무도 부츠를 벗기지 못할 것”이라고 농담을 했다.
리베스킨드씨는 WTC가 무너진 곳에 다시 세우려는 새 빌딩의 설계 공모에 당선된 건축가다. 마이크를 잡은 그는 독일이나 폴란드, 아니면 다 섞인 것일 수도 있는 ‘따다다다’ 하는 억양으로 “나는 폴란드에서 태어났지만 미국 시민입니다”라는 말을 먼저 꺼냈다.
그는 폴란드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다. 부모는 홀로코스트(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에서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었다. 미국행 배에 몸을 실은 것은 그가 열세살 때였다. 뉴욕 항구에 닿기 전 자유의 여신상을 본 것이 뉴욕에 대한 첫인상이었다고 그는 자주 말해왔다.
그가 자란 곳은 맨해튼 북쪽의 브롱크스였다. 브롱크스 과학고에서 수학과 음악 천재로 이름을 날렸다. 이스라엘에서 음악을 잠깐 공부하기도 했던 그는 뉴욕의 쿠퍼 유니언 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했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인 1970년은 그에 앞선 일본 이민자 미노루 야마사키가 설계한 WTC 쌍둥이 빌딩이 대학에서 불과 3㎞ 떨어진 곳에서 지어지고 있던 때였다. 수많은 뉴욕시민들처럼 빌딩이 모습을 갖춰가는 것을 눈 앞에서 볼 수 있었다.
영국 에섹스대학에서 역사 및 건축 석사학위를 받은 그는 이후 하버드, 예일 등 미국의 쟁쟁한 대학에서 건축을 강의했다. 요즘은 베를린에 본부를 두고 세계 곳곳에 130명의 직원을 둔 스튜디오(건축설계사무소)를 운영 중이다. 이제 WTC 재건축에 깊이 관여하게 되면서 리베스킨드씨 가족은 다시 뉴욕으로 이사할 예정이다. 경영 담당 파트너이기도 한 부인은 “나는 이사하는 데는 박사가 다 됐다”면서 “열세살난 막내딸이 어느 학교로 갈지 알아보는 중이다”라고 말했다.
그가 건축가로 세상에 본격 알려진 것은 1989년 독일 베를린의 유대인 박물관 설계를 맡으면서부터였다. 4000만달러짜리 이 프로젝트는 사실상 그의 첫 작품이다. 2001년 문을 연 이 박물관은 100만명 이상의 방문객을 맞이했다. 박물관의 지그재그 전시실은 큐레이터들에겐 일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들지만 “조명 좋고 반듯한 방으로 만들어진 빌딩이라면 그렇게 많은 사람이 구경오지 않았을 것”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해 리베스킨드씨는 3억2000만달러짜리 프로젝트인 WTC 재건축 설계를 위해 현장을 방문, “뉴욕의 스카이라인은 미국과 미국의 자유정신을 상징한다”라며 이를 설계에 담아내겠다고 말했다.
유대인 박물관 설계 때와 마찬가지로 WTC 재건축 설계작업에 앞서 역사 공부를 먼저 했다. 그는 ‘백경(모비딕)’의 작가 허만 멜빌, ‘풀잎’의 시인 월트 휘트먼 등 19세기 작가들의 작품도 두루 읽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는 WTC 재건축 설계안 제안서에서 ‘뉴욕에 대한 강한 확신을 표현하겠다’고 밝힐 수 있었다. 첨탑을 포함해 새 건축물의 높이를 미국 독립의 해인 1776년에서 따와 1776피트(약 538m)로 정한 것도 미국의 역사를 반영한 것이다.
WTC 빌딩 재건축 과정에는 난제가 적지 않다. 돈 문제에다 교통소통, 주차장 확보, 입주자 물색 등등 건물 구조에까지 영향을 미칠 요소들도 많다. 이런 문제들 때문에 설계를 고치라고 한다면 리베스킨드씨는 어떻게 나올까. 그는 대답한다. “설계라는 것은 변하기 마련이지만 기본 아이디어는 바꿀 수 없어요. 그렇지만 작품을 포기하기 전에 타협과 협상의 기술을 발휘해야 합니다.”
홍권희 특파원 koni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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