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크엔드 포커스]흔들리는 한국의 법의학

  • 입력 2003년 3월 6일 17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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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26일은 한국 법의학계에 ‘조종(弔鐘)’이 울린 날이다.

대법원은 이날 7년5개월 동안 1, 2, 3심을 오가며 ‘사형→무죄→유죄 취지 파기→무죄’를 거듭한 ‘치과의사 모녀 살인사건’의 피고인 이도행씨(43)가 무죄임을 최종적으로 확정했다.

재판부는 쟁점이었던 사망시간 추정에서 변호인단이 외국 법의학자들의 의견을 토대로 제시한 증거가 더 타당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검찰측에 이씨가 범인이라는 근거가 된 감정 소견을 낸 한국 법의학자들은 무색해졌다.

●부끄러운 법의학

1996년 이도행씨 사건의 항소심이 진행 중이던 서울고법의 한 재판정. 이씨의 변호인이 검찰측 증인으로 나온 법의학자 A씨에게 물었다.

“시반(屍斑·사람이 죽은 뒤 몸속 적혈구가 중력 때문에 시신의 낮은 곳으로 몰려 생기는 반점)이 부검할 때 누워있는 최씨 시신 앞면에 남아 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당신이 본 것은 시신의 옆모습을 찍은 사진인데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

당시 사건의 쟁점은 이씨의 부인 최씨의 사망시간이었다. 사건이 발생한 1995년 6월12일 오전 7시경에 이씨는 집을 나선 것이 확인됐다. 따라서 최씨가 7시 이전에 숨진 것만 확인된다면 이씨의 범행임이 입증되는 것이다.

검찰 주장대로 최씨가 오전 7시 이전에 숨졌다면 시반은 시신의 앞과 뒤에서 같이 나타나는 ‘양측성 시반’이어야 했다. 그런데 부검 현장에 없었던 A씨는 시신을 옆에서 찍은 사진을 보고 시신의 앞면에 시반이 있다고 증언한 것이다.

1998년 유죄 취지의 대법원 결정 이후 변호인단은 파기환송심에서 스위스의 법의학자 토머스 크롬페처를 증인으로 세웠고 전 세계법의학회 회장인 버나드 나이트 교수 등 4, 5명의 외국 법의학자에게 부검 자료를 보내 의견을 구했다.

이들은 국내 법의학자들이 제시한 시반, 시강(屍剛·사망 후 시간이 흐른 뒤 시신이 딱딱하게 굳는 현상), 위 속 내용물 상태를 통한 사망시간 추정은 불확실한 방법이고, 최씨가 오전 7시 이전에 사망했다는 소견은 과학적인 지식과 법의학적 경험에 맞지 않는다고 못박았다.

이 사건을 담당한 김형태 변호사는 “당시 검찰측 증인으로 나온 국내 법의학자 중 95년 출간된 사망 시간 추정과 관련한 최신 외국 서적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1973년 중앙정보부 남산분실에서 조사 받다 숨진 최종길 서울대 교수가 고문 등 가혹 행위로 숨진 것을 밝혀냈다.

국내 법의학자들은 자살 또는 사인 불확실이라는 부검 감정 소견을 냈지만 한 일본 법의학자는 타살 가능성을 제시했다. 국내 법의학자들은 이 일본 학자의 의견을 합리적으로 반박하지 못했다. 규명위는 타살 의견을 받아들였다.

92년 이른바 ‘김순경 애인 살해 사건’에서 검찰은 법의학자들의 부검 감정을 토대로 김모 순경을 구속 기소했고 1, 2심에서 유죄 선고가 내려졌다. 그러나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진범이 잡혔다.

98년 12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발생한 ‘김훈 중위 사망사건’은 자살과 타살 여부를 놓고 국내외 법의학자간의 격론이 벌어졌다. 일부 국내 법의학자는 김 중위의 총기 자살을 주장했지만 재미 법의학자 노여수씨는 “타살이 거의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자살로 판정이 났지만 유가족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현장은 말을 하는데…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사체는 말을 하고 그 말은 ‘사자(死者)의 변호인’인 법의학자가 듣는다. 사체가 하는 말은 사체가 발견된 현장이 동반돼야 더 정확해진다.

그러나 국내 법의학자들은 현장에 가지 않는다. 형사소송법 222조는 ‘변사자 또는 변사(變死·병이 아닌 다른 외부적 원인에 의한 사망)가 의심되는 사체가 있을 때는 관할 지검 검사가 검시(檢視)한다’고 규정하기 때문이다.

현장엔 수사관과 살인 등 강력사건이면 감식반이 가고 사체 검안은 공의(公醫)가 맡는다. 하지만 공의는 대부분 법의학 공부를 하지 않은 일반 의사다.

결국 현장에 널려 있는 정보가 수사관들에 의해 취사선택되고, 걸러진 정보가 법의학자에게 전달된다.

이도행씨 사건 현장을 조사한 경찰 감식반장은 사망시간 추정에 가장 필요한 사체의 직장온도를 재지 않았다. 사체가 담긴 욕조의 물 온도도 재지 않았다. 이 감식반장은 92년 김순경 사건 때도 현장에서 똑같은 실수를 했다.

영미법 계열의 국가에서는 검시를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검시관(coroner) 또는 법의관(medical examiner)이 독립된 수사권을 가지고 현장에서 조사한다.

그럴 여력이 없다면 최소한 현장보존 등의 기초수칙을 일선 경찰들이 숙지하고 실행하도록 교육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전문인력도 부족하다. 현재 전국에 법의학적 검사와 판단 능력을 갖춘 사람은 30명 안팎.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과를 빼면 전국 41개 의과대학 중 법의학교실과 교수진이 있는 의대는 5곳 뿐이다.

매년 25만여명이 사망하고 이중 변사자가 1만5000명에 이르는 한국 현실에선 150∼300명의 법의학자가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민동용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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