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본부가 있는 일본에서 생활하는 그가 최근 ‘글로벌 경영전략에 있어서의 환경안전’ 회의 참석차 귀국했다. 200년 전통의 글로벌 기업 최고경영자(CEO)급으로 성장한 김 사장을 만나 글로벌 CEO가 되기 위한 전략에 관해 들어봤다.
● 글로벌 스탠더드
김 사장은 서울고를 졸업하던 65년 UC버클리로 유학을 떠났다. 고교시절 우연히 만난 미국 콜로라도대 총장이 “한국의 고등학생들은 지나치게 책만 파고들어 세상과 싸울 힘이 없다”며 유학을 권한 것이 계기가 됐다.
김 사장은 자신의 유학시절보다 유학생수는 늘었지만 미국인과 똑같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문 현실을 걱정했다. 요즘 한국유학생은 한인공동체에서 한국적 스탠더드만 배워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
“언어를 제대로 배운다는 것은 그 나라의 문화와 사고방식을 배운다는 거예요. ‘미국식’을 배운다는 건 글로벌 스탠더드를 익힌다는 의미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유학생이 많이 왔다 가는데도 한국만큼 그 스탠더드를 잘 모르는 사회도 드문 것 같아요.”
식사모임의 대화부터 기업의 회의방법까지 ‘글로벌화’는 멀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참가자들이 사전에 목적이 뭔지, 어떤 결과물이 나와야 하는지를 공유하고 시작하는 게 회의인데 ‘한국식 회의’에서는 사장이 발언을 시작하면 그때서야 무슨 회의인지 아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선약을 지키지 않는 문화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언제, 어떤 회의를 하자고 하면 한국 사람들은 나중에 급한 일이 있다면서 안 오는 경우가 많다는 것. “상대방에게 선약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문화가 선약을 어기게 하는 결정적인 이유죠.”
김 사장은 듀폰 본사의 찰스 홀리데이 회장이 보자고 해도 “휴가가 예정돼 있다”며 미팅을 미룬 적이 있다고 했다. 회장도 “가족과 휴가를 가기로 한 선약은 먼저 지켜야 한다”며 받아들였다.
● 커지는 아시아 시장과 한국인
김 사장은 스스로 “앞서 국제화되긴 했지만 한국인이어서 혜택을 많이 받은 사람”이라고 했다. 아시아인이었기에 AP 사장에 발탁됐다는 것.
그는 다우케미칼과 합작했던 한양화학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해 14년 동안 다우케미칼의 테두리 안에서 일했고 한화가 다우케미칼을 인수하자 한화 경영관리실에서 3년 동안 이사로 일했다. 그때가 30대 후반.
한화에 있는 동안 듀폰과 합작회사 프로젝트를 맡은 덕에 듀폰코리아의 사장을 만나 이직인사를 하다가 일자리를 제안받았다. 그는 듀폰코리아에서 프로젝트 매니저, 마케팅 이사 등을 거쳤고 미국 테네시주의 존슨빌 공장에서 부공장장, 울산공장의 공장장으로 일했다.
“그때 꿈은 공장장이 되는 거였죠. 그러니 꿈을 이룬 셈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나도 모르는 새 더 큰 기회가 계속 열렸습니다.” 김 사장은 당시 AP 사장이던 홀리데이 현 회장의 ‘후계자 양성 프로그램’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글로벌 기업들은 ‘회장 후보’ ‘지역사장 후보’ ‘계열사 사장 후보’ ‘국가 사장 후보’ 식으로 등급을 정하고 후계자 양성 프로그램을 통해 인재를 발굴한다. 능력을 테스트하기 위해 1, 2년 사이에 업무를 계속 바꾸게 하며 업무마다 기대된 성과를 올리는지 평가한다.
홀리데이 회장은 김 사장에게 AP 자동차 사업부장을 겸임하라든가, 미국 본사의 불소 생산을 책임지라는 등의 기회를 열어줬다.
“홀리데이 회장은 이미 AP지역은 아시아인에게 맡겨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최근 글로벌기업들은 AP지역을 최대 성장 지역으로 꼽고 있으며, 경영책임은 그 지역 출신이 져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어요.”
97년 그는 세계 부직포 사업부 부사장 자리를 제안받는다. 듀폰 본사 경영진으로 활동하라는 주문이었다. 엔지니어로서 더 이상 올라갈 자리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김 사장은 뜻밖의 제안을 받고도 자신이 없어 처음에는 거절했다.
“아내가 그러더군요. ‘아시아인에게 처음으로 주어진 기회를 당신이 거절하면 다른 사람에게 돌아갈 기회마저 뺏는 것’이라고…. 본사에서 제게 기대하는 것은 아시아적 감수성이죠. 미국인이 AP 사장이 되면 잠깐 동안 좋은 성과를 올린 뒤 빨리 떠나고 싶어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거든요.”
그가 AP 사장이 됐던 98년은 경제위기로 아시아가 흔들리던 때였다. 본사에서는 투자 회수와 구조조정을 논의하고 있었다. 김 사장은 60일 동안 아시아 시장전망 조사를 통해 성장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역은 아시아라며 투자를 유지하고 구조조정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보고서를 냈다.
예상은 적중했고 AP지역은 듀폰의 ‘황금 시장’으로 떠올랐다. 화학산업 침체로 다른 지역이 마이너스 성장하는 동안에도 AP 지역은 2001년을 제외하고는 적으면 5%, 많으면 20% 이상 성장했다. 아시아 지역의 매출은 전체 매출의 16%에 불과하지만 이익은 전체의 20%가 넘는다.
● 50세 이전에 기회를 잡아야
김 사장이 듀폰 본사의 회장직까지 오를 가능성이 있는가. 김 사장은 “글로벌 기업의 회장이 되려면 30대 초반에 가능성을 인정받고 50세 이전에 기회를 잡아야 한다”는 말로 답변을 대신했다.
홀리데이 회장이 그렇듯 30대 초반부터 회장감으로 인정받은 사람은 20여년의 테스트를 거쳐 50세 무렵 회장으로 선출된다. 테스트 기간 동안 생산, 회계, 마케팅 등 경영에 필요한 모든 부서를 거치며 직원이 적어도 1만명이 넘는 대규모 부서를 운영해 봐야 한다. 어느 한 곳에서라도 낙제점을 받으면 ‘미완의 대기’로만 남을 뿐 회장으로 ‘낙점’되지는 않는다.
“요즘은 한국 젊은이들 가운데 처음부터 다국적 기업의 회장 자리를 노리는 사람도 많잖아요? 저는 단순히 공장장이 꿈이었지만. 처음부터 꿈이 큰 사람은 이루는 것도 클 테지요.”
김 사장은 60세를 즈음해 은퇴하기 전에 보다 많은 한국인, 아시아인을 ‘글로벌 CEO 후보’로 키우고 싶어한다. 그 뒤에는 그동안의 경험을 살려 컨설팅 회사를 꾸리거나 비정부기구(NGO) 활동을 했으면 한다.
하임숙기자 arteme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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