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연구 부문에서는 중앙박물관(36명)이 2위인 국립민속박물관(15명)을 크게 앞서 1위. 그러나 유물 관리 부문에서는 1위(중앙박물관·46명)와 2위(호암미술관·41명)의 차이가 크지 않았다. 호암미술관의 이오희 문화재보존연구소장은 유물 보존 처리의 전문가로 꼽혔다.
이종철 국립민속박물관장은 전통 문화의 위상을 높이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인물로 선정됐다. 또 응답자들은 안휘준 서울대 교수가 와 김병모 전통문화학교 총장이 문화재 관련 학계 영향력이 가장 큰 인물이라고 답했다. 전통 문화를 대중에 알리는 데 기여한 인물로는 단연 유홍준 명지대 교수를 꼽았다.
도자사 연구 분야에서는 정양모 경기대 석좌교수가 42명으로부터 최고 권위자로 평가받았다. 안휘준 교수는 회화사 연구 분야, 김동현 전통문화학교 교수는 고건축 분야의 독보적인 전문가로 꼽혔다. 불교미술 분야와 민속학 분야에서는 각각 황수영 전 동국대총장과 임동권 중앙대 명예교수가 거론됐다. 고고학 분야는 조유전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김병모 한국전통문화학교 총장, 이건무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실장, 최몽룡 서울대 교수 등의 이름이 나왔다.
문화재 보호 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시민단체는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이 손꼽혔다.
▼문화재전문가 3인 기고▼
《본보 문화부가 박물관·문화재 관련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각 분야의 권위자로 손꼽힌 정양모 경기대 석좌교수(도자사), 안휘준 서울대 교수(회화사), 이종철 국립민속박물관장(문화재 위상 제고)의 기고를 싣는다. 이들은 문화재와의 인연, 전통 문화 발전을 위한 제언을 밝혔다. 》
▼도자사 정양모 교수▼
1960년 초 국립박물관 미술과 직원은 5명 뿐이었다. 덕수궁 석조전 2층 사무실에 책상을 창문쪽 벽에 붙여놓고 앉은 5명은 오순도순 한 식구였다. 부학예관 최순우 선생이 과장인데 미술과에 오는 손님은 100% 그 분을 만나러 왔다. 문화재 감정 받으러 오는 분들도 모두 그분께 안내됐다.
나는 명색이 학예관보인 차석으로 최선생 곁에서 보좌하느라 그분과 보내는 시간이 많았고, 다른 식구들도 최선생과 손님, 최선생과 다른 직원들과의 대화를 모두 공유하게 됐다. 그러다보니 자주 들르는 손님과도 자연스럽게 친분이 맺어져 미술과 식구는 몇 년 사이 손님들까지 10명이 넘게 됐다. 미술과의 일도 재미있고, 보람도 느끼고 있었지만 최 선생을 중심으로 모이는 손님 식구들과의 고류와 우정 나눔도 큰 즐거움이었다. 지금까지도 만남이 지속되고 있다. 좋은 인연에서 싹트는 만남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유물(문화재), 유물과 유물의 만남이 모두 향기로운 것이다. 아름다움이 함께하고 있으니 흔연(欣然)하고 즐거울 수밖에 없다. 박물관에서 하는 일들은 남이 보면 귀살스럽고, 고리타분하고 답답한 것들이다. 때로 ‘저 사람이 밥이나 제대로 먹고 지내는가’ 하고 걱정도 하고, 격려를 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박물관 유물은 모두가 문화재이고, 그 하나하나가 선조의 손길과 정신에서 묻어나온 것이기에 평생을 그 속에서 보냈건만, 마음은 여전히 의연히 그곳에 있다. 그때는 손님도 한 식구였는데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 극도의 이기주의, 개인주의가 창궐해 자기 맡은 일과 관심있는 분야에만 관심을 갖고, 옆 동료가 하는 일을 누가 물어봐도 “모른다”고 손을 내젓기 일쑤다. 다른 사람에게 향하는 정성어린 이해와 배려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내 분야(도자기 연구)와 이와 관련한 분야에 대해 조그만 이해와 지식, 안목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은 좋은 인연이 있어 사람과 사람, 사람과 유물과의 향기롭고 아름다운 만남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정양모 경기대 석좌교수
▼회화사 안휘준 교수▼
미술사라는 학문은 미술의 역사, 미술에 관한 역사, 미술을 통해 본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이 세가지를 아우르는 학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래서 미술과 문화, 역사학과 고고학, 미학과 종교학 등의 분야와 이웃하고 박물관과 문화재 기관, 미술관, 화랑등의 기능과 밀접한 연관을 맺게 된다.
‘인문학의 위기’가 심각하게 논의되는 요즘에도 미술사만은 최고의 붐을 누리고 있다. 대학마다 대학원 입학을 위한 경쟁이 가장 치열한 점, 학문적 업적들이 줄지어 쏟아지고 있는 점, 학술모임마다 몰려드는 열띤 인파와 그들의 학문적 열기가 단적인 예들이다.
그러나 이런 붐은 필자가 대학생활을 시작했던 40여년 전에는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그때는 미술사라는 학문이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았고 적막하기 그지 없었다. 기껏해야 호사가들이 하는 미술감상학 정도로 인식됐었다. 필자도 미술사를 제대로 알지 못했고 따라서 관심도 없었다.
이러한 무지의 벽을 깨고 미술사 분야에 발을 들여 놓게 된 것은 오로지 스승을 잘 만난 덕택이다. 한국에서 처음 설립된 서울대 고고인류학과에 입학해 지도교수이신 삼불 김원룡(三佛 金元龍) 선생과, 시간을 맡아 출강하시던 여당 김재원(藜堂 金載元·국립중앙박물관 초대관장) 선생을 만나 지도받은 것이 큰 행운이었다.
여당 선생은 인류학자의 꿈을 키우던 필자를 설득해 미술사로 전공을 바꾸게 하셨고, 삼불 선생은 모교 강단에 서게 하셨다. 미국 유학도 스승들의 도움으로 가능했다. 이처럼 필자는 은사들의 학은(學恩)으로 키워진 미술사가라 하겠다.
미술사학도로서 필자의 삶은 바쁘고 고되지만 보람된 것이다. 좋아하는 공부를 하며 먹고 살 수 있는 사회적 환경, 문화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고조되는 시대 상황, 끊임없이 명작을 대하며 누리는 안복(眼福), 미개척 분야를 일구며 업적을 쌓아 가는 기쁨, 우수한 인재들을 기르는 보람, 전공을 살려 봉사하는 즐거움…. 이 모두가 내 행복의 근원이다.
안휘준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주성원기자 swon@donga.com
▼전통문화위상제고 이종철 관장▼
우리의 역사·문화 환경이 새봄을 맞고 있다. ‘평화와 번영 도약의 시대로’를 내건 참여정부가 출범하고, 현장 예술인이 문화관광부장관으로 부임했다.
필자의 일생은 전통 문화와 함께한 것이었다. 68년 문화재관리국 학예연구원부터 시작해 공직자로, 민속학 연구자로 일해오면서 느낀 보람과 긍지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전통 문화에 평생을 바친 한 사람으로 마침 새로 출범한 정부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개혁과 안정의 양가 목표를 이루려면 새 정부에 걸맞은 철학과 가치를 정립해야 한다. 이는 함석헌의 ‘생각하는 백성’과 김구의 ‘문화국가’라는 명제에 맞닿아 있다. 소 중화(中華) 문화와 일제 침략문화, 서구의 물질만능 속에서 버텨온 것은 오로지 7000년 역사의 얼과 문화 때문이었다.
문화전통은 우리의 모둠살이와 나눔공동체, 전통예술의 신명과 철학 등이 날줄 씨줄로 짜여 있다. 하지만 현대의 문화코드는 금력과 권력, 지식과 명예 등 무한소유에 빠져 있다. 경제안정 국민통합의 시발은 국부창출과 배분에 있으나 문화 긍지가 튼실하게 뒷받침해야 한다. 이를 위해 16세기부터 지금까지 역사 질곡을 증언하고 있는 용산의 철조망 문화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의 역사와 미래를 담보할 용산의 국립민속역사박물관 건립이야말로 역사적 사건이며, 민족적 혁신을 꾀하는 일이다.
런던, 파리와 같은 도시에는 거대한 도심공원이 있고, 거기에는 수백만 시민을 생동케 하는 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다. 이미 세계적 명소가 된 경복궁과 국립민속박물관은 조선 왕국의 본디 모습으로 되돌려야 한다. 한민족사와 민중생활사를 집성할 새 국립민속역사박물관 건립은 이제 선택사항이 아니다. 용산이라는 역사적 장소에 최고의 문화명품을 창출하는 것은 참여정부의 시대적 소명이다. 정치 혁신의 마무리는 민복 창조의 공간과 문화가 숨쉬는 숲에 있기 때문이다.
천하 범사에는 기한이 있고, 목적 달성에는 때가 있다. 참여정부의 개척자들이 초발심을 십분 발휘해야 할 연유가 여기에 있다. 새 봄을 온몸으로 맞으면서 새 정부가 용산을 주목해야 하며, 집중의 지혜를 펼쳐야 할 때가 왔다.
이종철 국립민속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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