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실경산수' 한국화展 여는 오용길

  • 입력 2003년 3월 25일 18시 14분


이번 전시에 선보일 오용길 작 ‘봄의 기운’. 오씨는 관념 산수가 유행하던 70년대에 과감히 땅과 일상으로 내려와 하찮은 나무와 풀, 마을과 꽃 야산, 적막한 산촌, 여기에 정겨운 사람들을 소재로 서정적이고 따뜻한 산수화를 만들어 냈다. 관람자들의 눈높이에 맞춘 수평구도역시 기존 산수화의 파격이다.  사진제공 동산방화랑
이번 전시에 선보일 오용길 작 ‘봄의 기운’. 오씨는 관념 산수가 유행하던 70년대에 과감히 땅과 일상으로 내려와 하찮은 나무와 풀, 마을과 꽃 야산, 적막한 산촌, 여기에 정겨운 사람들을 소재로 서정적이고 따뜻한 산수화를 만들어 냈다. 관람자들의 눈높이에 맞춘 수평구도역시 기존 산수화의 파격이다. 사진제공 동산방화랑

숱한 유행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현대 미술의 격랑 속에서 정통 한국화의 파수 역할을 해 온 한국화의 종맥(宗脈) 오용길(吳龍吉·55).

경기도 안양 작업실에서 두 시간 가량 이야기를 나누면서 기자는 ‘인간 오용길’을 알기엔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기업 임원처럼 보이는 단정한 옷차림은 ‘예술가’의 필수 에너지라 할 변화나 일탈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고 ‘가진 재주가 이것(그림)밖에 없어서’라는 겸양은 너무 자연스러워 곧이 곧대로 들렸다. 이런 그의 모습은 ‘전통산수’하면 떠오르는 선입견, 즉 고루함이나 지루함이라는 이미지와 섞여 자칫 그를 그렇고 그런 두루뭉실한 사람으로 생각하게 했다.

그러나 속은 180도 달랐다. 그의 안에는 누구보다 변화를 고민하는 혁명적 에너지가 가득했다. 사람좋은 인상의 한 구석에는 ‘누가 뭐래도 내 길을 간다’는 고집이 숨어 있었다. ‘요즘 같은 때 아직도 산수를 그리시느냐’는 세간의 평에 대한 생각을 묻자 ‘그리는 영역과 보는 영역은 다른 자리’라고 했다. 직문에 직답을 피했지만 이 얼마나 강한 자기 고집을 담은 말인가.

그러고보니, 그는 한국화의 모범생이 아니라 이단아였다.

심산유곡 웅장산세를 그리며 ‘구름 위를 떠도는’ 관념 산수가 유행하던 70년대에 그는 과감히 땅으로 내려왔다. 하찮은 나무와 풀, 마을과 꽃 야산, 적막한 산촌, 여기에 정겨운 사람들까지 그는 이런 일상의 소재들을 한국화의 영역으로 끌어 들였다. 또 전통 산수화의 ‘수직구도’를 깨고 파격적인 수평 구도를 택해 관람자의 눈높이를 현실로 끌어왔다.

그의 그림 앞에 서면 ‘실경산수(實景山水) 라는 게 누구나 보고 느끼는 뻔한 것을 소재로 한 것인 데 어떻게 새롭게 그릴 수 있을까’하는 걱정은 사라진다. 어떤 난해한 수사이전에 ‘참 잘 그렸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는 곧잘 “나는 환쟁이”라고 폄하하면서, “무릇 환쟁이는 뭐니뭐니 그림을 잘 그려야 한다”고 덧붙였다. 중언부언 같지만, 스물여섯에 ‘우(牛)시장의 오후’라는 수묵과 채색을 섞어 그린 사실성 있는 작품으로 문공부 장관상을 수상한 그의 이력과 결부시키면 말의 무게가 달라진다. 또 우리나라 동양화단의 맥을 이은 대작가들을 기려 제정한 ‘이당 김은호 미술상’,‘의재 허백련 미술상’,‘월전 장우성 미술상’ 등이 한결같이 그를 첫 회 수상자로 선정했다는 것은 그의 작가적 역량에 대한 평가의 반증이기도 하다.

“한국화의 파격을 불러일으킨 에너지의 원천은 무엇인가”고 물었을 때 그는 특유의 겸사(謙辭)를 섞어 “상상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나는 경험하지 않은 것은 그리기 힘들다”고 말했다.

곧이곧대로 들을 일이 아니다. 이 말 속에는 신비와 초월에 혹하지 않은 한 현실주의자의 생각이 그대로 녹아 있기 때문이다. 기자의 생각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그는 잠시 침묵을 깨고 인터뷰 내내 볼 수 없었던 가장 단호한 어조로 이렇게 말을 이었다.

“나는 인생이 뭐냐, 죽음이 뭐냐 이런 고민 별로 안 한다. 왜냐고? 생각할 필요가 없으니까. 허무나 고뇌는 나와 거리가 멀다.” “나는 세속적인 사람이다. 내가 속인(俗人)인데 어떻게 성인(聖人)처럼 사는가. 속되면 속된 대로 살아야지. 나는 현실주의자이자 체제순응주의자다.”

그는 자신을 ‘속되고 속되다’ 했지만 요즘 같은 변화난만 시대에 그의 고집은 정직해서 울림이 크다. 그에게선 외롭지만, 올곧게 세상을 살아 온 중년의 깊이가 느껴진다.

인정(認定)보다는 부정(否定), 화합보다는 분열, 인간보다는 기계가 흔하다보니 서정과 평화가 그립다. 그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을 오래 끌어안고 싶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26일∼4월8일까지 서울 견지동 동산방 화랑. 02-733-5877,6945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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