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무대에서 외친다. 검은 머리를 흔들면서. 뉴욕에서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는 팔레스타인계 여성시인 수헤어 하마드(29)는 요즘 일주일에 여섯차례씩 브로드웨이 롱에이커 극장에 선다. 작년 11월부터 4개월째다. 극장에서의 시 낭송을 시도한 기획제작자 러셀 시몬스(45)에 의해 발탁된 그녀는 분노와 절규의 시인이다.
하마드는 자신만의 언어와 길거리의 음악을 독특하게 섞어 만든 새로운 목소리라는 평가를 듣고 있다. 이름하여 힙합시인. 그녀의 이름 앞에 붙는 형용사다. 힙합에 어울리지 않게 그녀는 긴 소매 블라우스와 긴 치마 차림이다. 아랍계이기 때문이다. 최근 10여년간의 아랍계 미국인 작가들이 찾아나선 것은 정체성이었다.
하마드는 요즘 이라크전쟁 때문에 뉴스에 곧잘 오르내리는 요르단 암만의 팔레스타인 난민촌에서 태어나 뉴욕 브루클린에서 자랐다. 브레이크 댄스, 라임과 함께. 푸에르토리카인들이 많이 사는 거리에서 하마드는 소수파였다. 아시아인, 흑인과 함께. 올리브색 피부. 미국에선 ‘중간지대’다. 다른 이민자들처럼, 아니면 어떤 이민자들보다 더 아랍아메리칸들은 ‘이중성’에 괴로워하고 있다. 하마드는 그 피부색을 보면서 백인과 흑인 사이에서 흑인쪽으로 기울었다.
아랍계로서의 갈등과 자각을 그린 그녀의 시들은 ‘팔레스타인인으로 태어나, 흑인으로 태어나(Born Palestinian, Born Black)’ ‘이야기들(Drops of This Story)’이라는 시집에 들어 있다. 이 책을 펴낸 뉴욕의 할렘리버프레스는 흑인 문인들이 애용하는 출판사다. 하마드는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아랍어와 흑인들의 영어, 남미계의 스페인어를 배웠고 이것들이 내 시를 구성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하마드는 무슬림인 부모에게서 코란을 배웠고 거기서 시의 영감을 얻고 있다. ‘언어의 노래 속에서 살라’는 부모의 말에 따라 그녀는 시를 썼고 시인이 됐다. 그녀는 말한다. “시를 쓰는 것은 나 스스로를 최초 창조에 가능한 한 가까이 표현하는 일이다. 창작성은 나에겐 더 위대한 힘의 반영이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갈등. 서로 죽이고 피 흘리게 하는 역사. 뉴욕의 신문들이 툭하면 전하는 피의 소식들. 하마드는 머리를 흔들어댄다. 2001년 9월11일. 두 대의 비행기가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에 날아든 날. 그녀는 말을 잊었다. 그녀가 시를 다시 쓴 것은 그로부터 2주일 뒤. ‘그 이후 첫 시’라는 제목의 이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1. 아무 말도 없었다.
나는 한 단어도 쓰지 않았다./캐널 스트리트 남쪽(쌍둥이 빌딩이 있는 곳이란 의미)의 잿더미에서 시 한 편도./ 잔해와 DNA를 옮기는 냉동트럭에서 한 편의 산문도./한 마디도./…/첫째로, 신이시여, 실수이게, 조종사의 심장마비 때문이게 하소서/비행기 엔진고장 때문이게 하소서/그리고 신이시여, 악몽이게 하소서, 나를 지금 깨워주소서./신이시여, 두번째 비행기 다음엔, 제발,/내 형제를 닮은 사람이지 않게 하소서./…
이라크전쟁은 하마드에게 무슨 말을 하게 할까. 시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미국의 아랍계는 120만명. 2, 3세를 포함해 200만명이 된다고도 한다. 미국 내 한인들과 비슷한 숫자다. 첫 이민은 20세기 초의 레바논 사람들이었다. 그 다음은 제1차세계대전 직후 굶주림과 파괴로 고향 떠난 아랍인들이었다. 이들은 보스턴과 뉴욕에 정착했다. 레바논 산골에서 태어난 ‘예언자’의 칼릴 지브란도 보스턴에 정착해 살았다. 요즘은 디트로이트 로스앤젤레스 시카고에도 많이 산다. 뉴욕에서는 로어맨해튼에 많이 살고 일부는 브루클린에 정착했다.
다른 이민자들처럼 미국에서 문화갈등을 겪는 아랍계 작가들이 즐겨 다루는 주제는 가족이다. 유목민의 천막 속에서 그렇게 강했던 가족애가 흔들리는 것이 두려운 모양이다. 미국의 한인들처럼. 그래서 그런지 하마드는 뉴욕의 한인들에게서 친밀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 이후 첫 시’의 둘째 연에서 하마드는 뉴욕 코리아타운의 한인식당을 정겹게 그리고 있다. 식당 종업원의 온화한 미소와 옥수수차, 그리고 김치와 비빔밥을 맛보고는 ‘한국, 고맙습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홍권희 특파원 koni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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