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절필선언 이후 경기 용인시에 ‘한터산방’을 마련한 소설가는 10여년간 그곳에 머무르며 자연 사람 문학 가족 인생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용인 생활을 정리하고 돌아온 아버지는 딸에게 원고를 건네며 “네가 그림을 그려보면 좋을 것 같다”고 제안했다. 뒤늦게 그림공부를 시작한 딸과 산문집 ‘사람으로 아름답게 사는 일’(이룸)을 공유하고 싶었던 것이다.
‘예술하는’ 아버지와 딸이 모처럼 집 밖에서 오붓한 시간을 가졌다. 소설가 박범신(57)의 명지대 연구실로 딸 아름씨(28)가 찾아왔다.
“미술에 대한 그리움이 그렇게 강렬한지 몰랐다. 조금 늦었지만 자신이 지향하는 바를 알고 그 속에서 행복해 하는 네 모습을 보니 너무 좋아. 아빠 책이어서 어쩌면 민망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제 디자인을 할거야’라고 세상에 알린 셈이 아니겠니.” (아버지)
“막상 책이 나오고 나니 사람들에게 보여주기가 창피했어요. 더 잘할 걸, 더 열심히 할 걸 하는 미련도 생기고요.” (딸)
“예술가는 발가벗겨져서 시청 앞에 내던져지는 것 같은 기분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해. 지난 30년간 해 온 일을 돌이켜보니 고통스러웠지만 내 지향 하나를 품고 걸어온 것이 위로가 되더라. 그래서 일상화에 매몰되지 않았던 것 같아. 그런 면에서 문학이 내 ‘방부제’인 셈이지.” (아버지)
지난해 연세대 인문학부를 졸업한 아름씨는 국민대 시각디자인과에 학사편입해 요즘 디자인 공부에 한참 빠져 있다. 아버지는 딸이 겪어야 할 예술가로서의 삶과 그에 동반하는 창작의 고통을 묵묵히 지켜볼 뿐이다.
“내가 요즘 농반 진반으로 ‘다시 태어나면 아버지 안 될래’라고 이야기하는 것, 너 아니? (웃음) 치열한 세상 속에서 너희들이 살아 나갈 생각을 하면 마음 깊은 곳에서 연민이 든단다. 네가 잠시 힘들어서 졸업하고 그냥 취직이나 해버릴까, 마음 흔들린 적도 있는 거 알지만 아버지로서 모든 것을 시시콜콜 아는 체 해서는 안 될 것 같아서.” (아버지)
“책 작업을 하면서 덜컥 겁이 났어요. 내가 아버지만큼 내 분야에서 잘할 수 있을까, 주변 사람들의 이해와 인정을 받을 수 있을까…. 모두 아버지처럼 오랜 시간을 들여야 하는 부분이었지요.” (딸)
이들은 책을 통해 아버지와 딸이 한 대등한 인간으로 만날 수 있었다는 점을 이번 작업의 가장 큰 ‘소득’으로 꼽았다. ‘따뜻해지는 방법을 찾은 아버지’와 ‘속 깊고 믿음직스러운 딸’의 이야기는 한참이나 계속됐다.
올해로 등단 30년을 맞는 박범신은 곧 장편소설과 시집을 출간하며, 이달 중순경 제자들이 이를 기념하는 행사를 열 계획이다.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