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8월의저편 282…손기정 만세! 조선 만세! (10)

  • 입력 2003년 4월 2일 18시 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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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늘게 뜬 눈으로 구름을 좇던 우철은 눈을 감았다. 태양이 작열한다. 면 셔츠를 입고 있는데, 햇볕이 직접 피부에 닿는 것처럼 무덥다. 더위 때문에 숨이 가쁘고, 그 움직임에 관자놀이에 고여 있던 땀이 흘러 떨어진다. 엥-엥, 엥-엥, 모기 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싶더니, 땅이 기우뚱 기울고, 머리가 미끄러지는 것 같은 감각이 엄습하여 우철은 두 손으로 갈대를 꽉 잡았다. 그런데도 눈은 뜰 수가 없다. 눈이 부셔서. 잠이 와서. 어질어질 현기증이 일 것 같은데, 눈 속 얇은 막 너머로 빨간 빛을 보고 있는 사이, 더위와 잠이 우철을 완전히 포위하였다.

물 속에서 눈을 뜨고 있는 것처럼 분명치 않다. 뭔가를 보려고 하는데 형태도 색도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뭔가의 기척은 바로 가까이에 있어, 조금씩 조금씩 다가오고 있다. 아, 알았다, 가게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꾼 꿈이다. 그 꿈하고 이어지는 꿈? 아니, 아버지가 아니다, 다른 남자다. 새하얗고 두꺼운 새털구름이 태양을 가리면서 남자가 서 있는 장소에 그늘이 드리운다. 똑같다. 이번 남자는 키가 꽤 크고, 나이도 제법 먹었다. 머리는 거의 백발인데, 드문드문한 검은머리가 빛을 반사하고, 이마에 돋은 땀방울이 하나 둘 비누 거품 속으로 들어간다. 남자는 선 채로 얼굴을 들어 하늘을 향하고, 신중한 손놀림으로 장도칼을 움직이고 있다. 구름 사이로 태양이 살짝 보이는 순간, 장도칼을 쥔 손등의 혈관이 불거지고, 주름이 자글자글한 목덜미에 칼날이, 두 번째라서 가슴은 그리 두근거리지 않는다, 숨을 토해 내고, 파아, 들이쉬고, 큐우, 파아, 큐우, 파아. 남자가 나를 보았다. 나를 통해 뭔가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남자를 통해 뭔가를 보려는 것처럼. 거울? 이 노인이 나인가? 장도칼이 천천히 남자의 목으로 가라앉는다. 더 이상은 보고 싶지 않다. 소리라도 꽥 지르고 눈을 떠야 하는데. 억, 헉, 아이고, 소리가 나지 않는다! 팔도 다리도 딱딱하게 굳었다. 솔솔 부는 바람에 구름이 움직여 남자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그러나 남자의 눈에는 흥미롭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내 반응을 보면서 즐기고 있다, 자기 목을 자르고 있는데 아프지 않은가. 이 꿈은 위험하다! 목이 잘리면 나는 강가에서 곤히 잠든 내 몸으로 돌아갈 수 없다. 살려줘! 누구 나 좀 살려줘! 뛰이! 눈꺼풀이 떠졌다. 칙칙폭폭 칙칙폭폭 칙칙폭폭, 경성행 보통 열차가 용두산 앞 철교를 건너갔다. 우철은 흙과 풀에서 피어오르는 후끈한 냄새를 들이쉬고는, 풀과 땀을 꼭 쥔 채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글 유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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