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난세를 평정하는 중국 통치학'

  • 입력 2003년 4월 4일 17시 27분


◇난세를 평정하는 중국 통치학/리쭝우 지음 신동준 편역/703쪽 1만9000원 효형출판

면후심흑(面厚心黑). 낯짝이 두껍고 뱃속은 시커멓다는 뜻이다.

20세기 초 중국의 리쭝우((李宗吾·1897∼1944)가 창안한 후흑학(厚黑學)은 국내에서 ‘기서 후흑학’(1988) ‘후흑열전’(1999년) 등이 발간되며 낯설지 않게 됐다.

중국에서도 후흑학은 1997년 이쭝우 저작의 모든 판본을 총망라한 ‘리쭝우와 후흑학’이 출간돼 큰 인기를 끌었을 정도로 최근 재조명받고 있다. 기발한 발상이라는 차원을 떠나 당대의 처세술로, 통치자의 득국(得國)과 치국(治國)의 원리로서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리쭝우와 후흑학’ 및 그를 추종하는 학자들이 요약한 글을 함께 모은 ‘후흑학’(1990)을 번역한 것으로 사실상 후흑학의 모든 정수가 담겨 있다.

면후심흑은 말 뜻 그대로 단순하게 ‘뻔뻔하고 음흉한’ 통치학 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상황에 따라 굴욕을 참아낼 수 있을 정도로 강인하면서도 유연한 변신이 ‘면후=두꺼운 낯짝’이라면 결단을 내릴 때는 ‘인의(仁義)’나 상대의 여건을 고려치 않고 냉혹하고 잔인하게 처리하는 것이 ‘심흑=시커먼 뱃속’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한 고조 유방(劉邦)을 이 분야의 대가로 꼽는다. 항우(項羽)가 유방의 부친을 인질로 삼아 삶아 죽이겠다고 하자 유방은 태연히 그 국 한 사발을 나누어 달라고 했다(면후). 유방은 한 왕조 건설의 일등공신인 한신(韓信)이 제나라 땅을 가진 뒤 힘이 커지자 없는 죄를 뒤집어씌워 죽였다(심흑).

반면 항우는 어떤가. 홍문(鴻門)의 연회에서 후세에 욕을 먹을까 두려워 유방의 목을 치지 못했고 해하(垓下)의 싸움에서 패한 뒤 강동으로 돌아가 권토중래를 꾀하지 않고 강동의 부형들 보기가 부끄럽다며 강에 몸을 던졌다.

하지만 후흑은 능수능란한 ‘권모술수’에 그치지 않는다.

그의 이론은 20세기 초 열강의 이권쟁탈과 내전, 그리고 일본의 침략이 극심했던 격동기에 ‘후흑’으로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요청에 의한 시대적 산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후흑을 쓸 때는 전제조건이 붙는다. 어설픈 후흑은 오히려 자신을 망친다는 것과 후흑을 공리(公利)를 위해 쓰지 않으면 실패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옮긴이는 ‘인의도덕’같은 이상에 빠지기보다 철저하게 실용적이면서 상황 대처가 빠른 후흑학을 통해 대통령학과 같은 서양의 리더십학이 아닌 ‘동양적 통치학’의 가능성을 엿보고 있다.

188개의 역주를 달 정도로 꼼꼼한 번역이 원작 이해에 큰 도움을 주며 후흑론을 이용해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캐릭터와 지난해 대선의 전 과정도 풀이했다.

서정보기자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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