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 서재는 유년의 놀이터
그는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셨던 증조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온갖 책들이 쌓여 있는 서재를 놀이터 삼아 자랐다. 어린이를 위한 책이 별로 없던 시절 그는 아버지의 서재에 있던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고 그중에서도 소설과 역사책을 특별히 좋아했다. 하지만 그가 서울대 사학과에 입학한 것은 그저 ‘교양’을 쌓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 당시 한국사회에서 여자가 직업을 갖는다는 것은 팔자가 세고 불행한 여자나 하는 일로 여겨졌다. 대학을 나와 직장을 갖는다는 것은 뼈대있는 집안의 교양 있는 규수로 자란 그로서는 생각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의 어머니는 전통적인 유교 집안에서 태어나 유교 집안의 며느리로서 일생을 살았다. 전근대와 근대가 교차하는 한국사회에서 90여년을 살아오신 어머니는 ‘자기’라는 것을 주장할 기회를 못 가졌기에 오히려 남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 내면화된 분이다. 이 이사장은 그렇게 3남3녀를 키워낸 어머니야말로 “훌륭하게 충만한 삶을 사신 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미 어머니의 시대는 가고 있었다. 이 이사장은 자신이 받은 ‘좋은’ 교육을 다시 사회로 되돌릴 책임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은 것은 행운이었지만 약소민족의 여성으로서 억눌린 삶을 살아야 했던 것은 그를 규정짓는 또 하나의 현실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광복을 맞고 혼란한 시기에 청소년기를 보내야 했다. 약소민족의 비애를 체감하면서 역사에 대해 더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됐고 남성중심적인 한국 사회의 여성으로 살면서 차별 받는 약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됐다. 그는 이런 행운과 불행의 양면을 모두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지적으로, 또 도덕적으로 성장하는 데도 도움이 됐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동양과 서양, 특권적 삶과 억눌린 삶의 양면을 모두 고려할 수 있는 넓은 시야와 사고의 깊이를 갖게 됐다는 것이다.
● 19세기 러시아의 고민에 공감
서울대 2학년 때 미국의 명문 웨슬리대로 유학을 떠났다. 1957년 그곳에서 소련이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호를 발사하는 것을 보며 소련을 다시 보게 됐고 러시아지성사 강의를 들으며 러시아사 연구로 방향을 잡았다. 그후 래드클리프대를 거쳐 하버드대에서 리처드 파이프스 교수의 지도 아래 19세기 러시아지성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19세기 러시아 지성들의 고민이 당시 한국 지성인의 고민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러시아 지성인들은 근대 유럽의 문화를 러시아의 전통과 어떻게 결합시킬 것인지를 고민했고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혁명의 길을 택했다. 이는 바로 당시 한국 지성인들이 고민하던 현실과 유사했다. 그는 한국에서 반공교육을 받으며 적대적으로 이해했던 러시아에 대한 생각이 바뀌면서 러시아지성사 연구에 몰두했고, 러시아의 사료를 공부하면서 편견과 이념의 굴레를 벗고 역사의 진실을 보는 눈을 가지게 됐다.
1972년 미국에서 대학교수로 있다가 귀국해 마주한 한국의 현실은 19세기 러시아의 현실과 너무나 흡사했다. 군대가 대학을 점령하고 군사쿠데타가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현실. 그의 지식이 ‘죽은 지식’일지 모른다는 반성을 했다. 게다가 당시 국내 상황에서는 러시아 사료를 구해 볼 길도 없었다. 그는 사료 대신에 이념과 가치관의 갈등이 극심하던 한국 사회의 현실을 바라보며 역사를 다시 공부했고 신문과 잡지를 통해 지성인으로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 인간중심 역사관의 소중함
지성사를 전공한 그는 역사에서 지성인의 역할에 대해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지식인들의 역할을 다룬 제임스 윌킨슨의 ‘지식인과 저항’(문학과지성사)을 번역하고 볼셰비키 혁명으로 향하는 러시아 역사의 방향에 대해 고민했던 당시 지성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인텔리겐차와 혁명’(홍성사)을 편역한 것도 그래서였다.
역사를 볼 때 가장 중시한 것은 인간 자체의 문제. 웨슬리대 시절 알렉산드르 게르첸의 ‘피안(彼岸)에서’를 읽으면서부터 갖게 된 생각이었다. 1848년의 혁명을 목격하고 쓴 이 책을 읽으며 그는 역사의 발전법칙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반성하고 법칙 이전에 구체적 인간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귀국 후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의 ‘마르탱 게르의 귀향’, 카를로 진즈부르그의 ‘치즈와 구더기’ 등 아날학파의 역작들을 읽으면서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구체적 인간들의 일상적 삶에 관심을 기울이며 이를 위해 역사 사료를 성실히 이용하는 연구자들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20세기 중국의 지성사를 다룬 조너선 스펜스의 ‘천안문’에서는 사료를 엄밀하게 이용하면서도 생동감 있게 역사를 서술하는 기법을 배웠다.
또한 니체의 ‘선악의 피안’을 통해서는 지성사 연구자가 빠지기 쉬운 이분법적 사고를 근본적으로 반성할 수 있었다. 니체는 선악의 구분이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줬고 이는 역사관뿐 아니라 그의 인생관에도 영향을 줬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의 이념적 성향을 보수나 진보로 쉽게 단정짓지 않는다. 그는 “골짜기에 있는 사람들은 주변밖에 볼 수 없지만 정상을 향하고 있는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산 전체를 바라볼 수 있다”고 말한다. 오만한 지적 편견으로 역사와 인간을 재단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 교육의 위기가 지성의 위기로
한국 최초의 러시아사 전공자로 한국슬라브학회를 창립하고(1985) 서울대에 러시아연구소를 세우며(1989) 활발하게 활동하던 그는 정치의 혼란 속에서 현실의 토대가 무너지고 있음을 절감했다. 그는 세상을 향해, 합리적 토론을 통해 공론을 형성하지 못하는 한국 사회 현실의 근본적 문제가 참다운 지성인을 길러내지 못하는 교육에 있다고 지적했고 국사편찬위원회와 교육개혁위원회 등에도 참여했다.
여성계를 대표하는 지성인이었던 그는 1996년 주핀란드 대사직을 제의 받아 한국 최초의 여성 대사가 됐다. 대학을 떠나는 것은 아쉬웠지만 학문에만 전념할 수 없는 한국 대학의 현실에 안주할 수 없었고 이제 여성 대사도 나와야 한다는 여성계의 설득도 그를 움직였다. 또한 서양사를 공부한 사람으로서 서유럽와 교류하는 데 그동안 공부한 것을 활용해 볼 기회라고 생각했다. 핀란드대사를 거쳐 러시아대사를 지내면서 사람을 이해하려면 살아온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자녀도 다 키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국가를 위해서도 일했지만 항상 아쉬운 점은 학자로서의 역할이 부족했다는 생각이다. 공직을 떠나면 지나온 연구성과를 총정리해서 한동안 중단했던 러시아사 개설서의 집필을 계속할 계획이다. 그는 ‘온고지신(溫故知新·옛 것을 익혀 새로운 것을 안다)’의 지혜가 잊혀져 가는 것이 한국 사회가 겪는 거대한 지성의 위기, 도덕적 위기의 주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역사를 통해 현실을 반성하고 미래를 계획하는 지혜가 사라져 간다는 것이다. 그가 러시아사 개설서를 저술하려는 것은 학자들뿐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이런 지혜를 전해주고 싶기 때문이다.
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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