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미안했지만 약속시간 때문에 앞만 보고 내닫는데 맞은 편에서 우리 막내 또래 아이와 엄마가 보였다. 어쩜, 우리처럼 엄마는 빠른 걸음, 아이는 엄마 손을 놓칠세라 열심히 뛰어오고 있었다. 그렇게 가다보니 또다시 엄마 손 붙든 아이의 종종거리는 모습.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앞서 가는 엄마와 처지는 아이. 이 ‘속도차이’는 아이를 키우다 보면 겪을 수 있는 일이다. 이럴 땐 엄마도 아이도 모두 괴롭다. 우리 아파트 아래층에 사는 희석엄마는 아들 희석이 때문에 한숨을 폭푹 쉰다. 초등학교 5학년인 희석이는 성적이 바닥이고, 억지로 공부를 시킬라치면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공부는 죽어도 싫어”다.
희석이가 좋아하는 것은 노래부르기인데, 희석 엄마가 아무리 ‘고슴도치 엄마’ 눈으로 들여다 보아도 재능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희석 엄마가 제일 기막혀 하는 건 어느 날 “커서 뭐가 될래”하고 물으니 “배달을 하겠다”는 녀석의 진지함이다.
꼭 공부가 아니라 뭔가 하나라도 잘 하는 게 있었으면 하는 것이 희석엄마의 바람이지만 ‘우량아’ 희석이는 하루종일 뭔가 입에 달고 사는 것이 낙이다. 엄마 눈치만 살살 보고, 틈만 나면 컴퓨터 게임에 몰두하는 희석이를 보면서 희석엄마는 억장이 무너진다. “어떻게 저런 애를 내 속으로 낳았나!”
엄마들은 자식이 부모보다 나은 사람이 되길 기대하지만 모든 아이가 영특하진 않다.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고 부푼 기대가 사그라들 때의 실망감이란. 도대체 아이에게 뭘 기대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암담해지면 엄마 자리 사표라도 내고 싶어진다.
중1인 큰아이가 초등학교 시절 컴퓨터 게임에 빠져 몇 달 동안 오락실을 드나든 사실을 뒤늦게 알고 나도 한동안 속을 끓였다. 어느 날 도 닦는 심정으로 찾은 푸른 바닷가에서 문득 깨달았다. 지금 내 아이는 행복한가. 그 다음부터 아이의 행복에 눈높이를 맞추려고 노력했다.
요즘 아무리 엄마가 아이의 ‘매니저’라지만 아이의 미래 행복까지 재단할 수는 없다. 아이가 명문학교에 진학하고, 근사한 직업을 갖게되길 바라지만 아이가 장차 갖게 될 직업의 귀천이 지금 아이가 누려야 할 행복보다 중요할 순 없다.
철학자 칼릴 지브란은 ‘아이들’이란 시에서 부모와 자식을 활과 화살에 비유했다. 활은 힘껏 화살을 쏘아 올려주면 된다. 화살이 어디로 갈지는 화살의 운명이다. 희석엄마는 아들이 배달 일을 한다는 말에 펄쩍 뛰지만 희석이는 장차 배달업계의 큰 사업가가 될지도 모른다. 한 걸음만 늦춰 아이의 발걸음에 맞춰보자. 엄마는 조금 느려질지 모르지만 아이는 편안해진다.
박경아 서울 강동구 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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