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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지(生紙)의 캔버스에 검은 사각기둥만을 그리는 독특한 작업으로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원로 서양화가 윤형근(75·사진). 95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참여 작가이자 이 시대 몇 안 남은 진정한 예술가라는 평을 듣고 있는 그를 만나기 위해 벼르고 있었다. 마침 김창열 서세옥과 3인전을 연다는 소식(9∼22일 이화익 갤러리)을 듣고 연락을 취했지만 ‘화가는 그림으로 말할 뿐’이라며 인터뷰를 거절한 것이다.
만남은 예기치 않게 이뤄졌다. 며칠 뒤, 경주 아트선재미술관 이강소씨 개인전 오프닝에서 조우한 것이다. 가까운 친구들이 그를 보고 ‘자이안트’라고 부른다는 말이 실감났다. 훌쩍 큰 키로 성큼성큼 전시장을 돌아다니며 떠들썩한 무리에서 내내 비켜 서 있는 그를 보면서 과묵하고 무거운 그의 그림을 떠올렸다.
차나 한잔 하시자고 청했다. 미술관 옆 호텔 커피숍에 자리를 잡았다.
“화가들이 기자들 만나서 자기 그림 선전하는 게 영 못마땅해. 그림은 읽는 것이 아녀. 보는 거지.”
느린 어조의 목소리는 탁했지만 쩡쩡 울렸다. 눈빛은 쏘아보는 듯 강렬했다. 여간해선 잘 웃지 않았고 농(弄)도 하지 않았다. 일흔을 훌쩍 넘긴 나이인 그에게서 느껴지는 저 비장함의 정체는 무엇일까.
자라온 환경과 그림과의 인연, 서울대 미대 입학시험 날 첫 인연을 맺었다는 장인 김환기 선생과의 사연 등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마침내 그의 내면과 닿았다. 거기에는 일흔 평생을 삶의 공포, 두려움과 싸우면서도 그 고통에 지지 않았던 한 진실하고 강인한 인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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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생인 그는 일제 식민지, 태평양전쟁, 6.25를 전후한 격동 속에서 어린 시절과 청년기를 보냈다. 피가 뜨거웠던 청년시절 마르크시즘에 매료됐던 그는 대학시절 데모하다 퇴학당했다. 6.25를 겪으면서 마르크시즘을 버린 그는 공산군에 붙잡혀 죽을 고비까지 넘겼다. 그때 하도 놀래서 머리가 하얗게 새어 버렸다고 한다. 군인들 초상화 그리는 일부터 부두 노동자까지 온갖 일을 전전하다 삼십대 초반에 홍익대 미대에 편입했다. 졸업후 고교 교사 생활을 하던 중 서슬퍼런 박정희 시대에 입시부정 사건을 폭로하면서 빨갱이로 몰려, 42일을 남산 대공분실 지하실에서 보냈다. 이후 20여년간 시간 강사를 전전하다 쉰 다섯에야 경원대에 자리를 잡고 총장까지 올랐다. 5공 시절엔, 광주사태에 환멸을 느껴 도망치듯 파리로 가 2년간 살았다.
자신에게 흐르는 ‘역(逆)의 에너지’ 때문에 고통스럽지 않았느냐고 묻자 “늘 내일은 막막하고 두려웠지만 그때마다 ‘언젠가 내가 좋은 거 한다’는 고집으로 살았다”는 답이 돌아왔다. 과장이나 포장이 아니었다. 때로 그가 탈속한 사람처럼 보이는 것도 그의 시선이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어떤 곳에 닿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마치, 시를 읊듯 이렇게 토로했다.
“예술은 서러워야혀. 엄청난 체험이 있어야 혀. 그래도 나올까 말까 하는 것이여. 서러움을 가슴에 쟁이면 마흔 중반쯤 돼 철이 나. 그때까지는 방아쇠 한번 튕기면 멀리 갈 수 있는 스프링을 쟁이는 거여. 그래야 작품에 혼이 배고 노동이 배는 거여. 머리로 그리면 여운이 없어. 가슴에서 뛰쳐 나와야지.”
그의 말은 독백처럼 계속 이어졌다.
“그림은 자꾸 걸러내야 혀. 군더더기 잘라버리고. 시처럼 외마디 소리에 담을 수 있으면 그게 최고여.”
“예술은 종교여. 어떤 사람들은 내 그림을 불교적으로 보는데 나는 종교가 없어. 분노 응어리 서러움을 가득 쟁여서 토해내면 나중에 뭔가 돼. 그게 진짜여.”
그의 그림은 금욕적이고 냉정하며 지적(知的)이다. 자연도 아니고 사회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하지만 그 전부를 아우를 수 있는 ‘세계’가 있다. 그의 그림은 침묵과 닮아있다. 문득, 세상이 떠들썩해도 우리는 그와 같은 이시대 진정한 어른들이 전하는 ‘싸일런트 마이너리티’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02-730-7818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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