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장관의 전 남편 김모씨는 1988년 사회과학 출판사 대표로 있을 당시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번역 출간한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로 구속됐다. 그때 주임검사가 이 검사였다. 이 검사는 이렇게 기억을 더듬었다.
“강 장관이 (판사 시절) 사무실로 찾아와 서류를 내밀었다. 제목이 ‘국가보안법에 대한 강금실 본인의 견해’였다. ‘판사 자격으로는 낼 수 없다’고 했더니 ‘김○○의 처 강금실’이라는 이름으로 제출하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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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안사범-검사 인생유전 |
강 장관과 이 검사의 사사로운 ‘악연’은 시대의 변화를 극명히 보여준다.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공안검사들은 정권 안보의 첨병이라는 비판 속에서도 출세 가도를 달렸다. 이제는 법무부 장관뿐만 아니라 대통령이 공안검사와 ‘코드’를 달리한다. 대통령 스스로 변호사 시절인 87년 대우조선 파업 사태 때 노동법상 제3자 개입금지 조항 위반으로 구속됐었다.
최근 노 대통령은 한총련 합법화 문제를, 강 장관은 국보법 대체입법 문제를 제기했다. 법무부는 공안부 존폐 문제를 검토 중이다. 공안사범이 빛나는 훈장이 된 현실이라면 공안검사 경력은 감추고 싶은 과거가 돼 버린 것일까. 전현직 공안검사 5명을 인터뷰했다.
●공안검사, 정치검사
80년대 공안검사로 이름을 날리던 A변호사를 먼저 만났다.
―대학 시절 대자보에서 A변호사의 이름을 많이 봤다. 머리에 뿔 달린 무시무시한 사람일줄 알았다.
“공안검사 시절 피의자 가족들도 그런 말을 했다. 직접 만나보니 미남이라면서….”
―공안부 폐지론이 나오는 요즘 심경이 어떤가.
“주말도 없이 열심히 일했는데 착잡하다. 정통성 없는 정권 유지를 위해 반체제 사범들을 양산한 면이 있다.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체제와 정부를 명확히 구분하기란 힘들다. 평검사로 일할 당시 공안부장에게 사건을 들고 가면 부장은 항상 이렇게 물었다. ‘그 사건이 반체제적이냐 반정부적이냐.’ 나는 ‘반체제적이면서도 반정부적입니다’라고 답했다. 그런 것이 공안업무다.”
―공안검사는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인가.
“정치가 법 위에 있다. 옛날에는 수사 중인 사건에 대해 국회의원이 ‘구속은 몇 명 정도 한다’고 기자회견을 하기도 했다. 정치권과 검찰이 6 대 4 정도로 책임져야 한다.”
공안검사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들을 다룬다. 이 때문에 정치적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힘들다. 선거 때마다 ‘북풍(北風)’이 불어 여당 후보를 도왔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87년 대한항공기 폭파사건은 공교롭게도 대통령선거 18일 전에 발생했다. 이 사건을 맡았던 검사가 앞서 강 장관과의 악연에서 소개된 이상형 검사다. 이 검사는 89년 서경원 전 의원 밀입북 사건을 맡아 당시 평민당 총재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국보법상 불고지 및 외환관리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10년 후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자 검찰은 이 사건 재조사에 착수, 공안 검사가 공안 검사를 수사하는 전무후무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 검사는 자신이 김 전 대통령을 조사했던 시간과 같은 15시간 동안 후배 검사로부터 조사를 받았다. 그는 “검사는 피의자를 잘 만나야 된다”는 말을 남기고 한직을 전전했다.
●공안검사들의 세계
최근 23년간의 검사 생활을 접고 명예퇴직을 신청한 이 검사는 실명 인터뷰를 허락했다. 그는 공안업무 가운데 특히 ‘대공’이 주특기였다고 밝혔다.
―김대중 전 대통령 시절 간첩이 한 명도 안 잡혔다는 이야기가 있다. 대검찰청에 사실이냐고 물었더니 ‘구체적인 통계를 밝히기 곤란하다’고 하더라.
“간첩사건 수사는 어렵다. 관련자가 다수인 데다 수사권이 미치지 않는 제3국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아 증거 수집이 어렵다. 옛날에는 단파방송 수신기나 마이크로 필름과 같은 증거를 남겼지만 지금은 기밀을 탐지해 전화만 하면 끝이다. 물증이 없어 자백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어떻게 자백을 받는가.
“간첩사건은 진술이 1000마디를 넘지 않는다. 따라서 의미있는 첫 진술을 받아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북에서 온 것 맞느냐?’ ‘아니다’로 시작하면 그 수사는 끝이다. 김현희 수사를 예로 들겠다. 조사를 시작하려는데 마침 밖에서 시위대가 ‘살인마 전두환 이순자 부부를 처단하라’며 데모를 했다. 그 소리를 들은 김현희는 ‘세상에, 인민검찰소 앞에서 전직 국가원수를 죽이라고 소리치다니…’ 했다. 자기가 알고 있던 것과는 달리 대한민국이 자유가 있는 나라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아주 의미있는 첫 진술이었다.”
―기자가 취재원의 입을 여는 것보다 훨씬 힘들겠다.
“문제는 진술의 대부분이 허위 자백이라는 점이다. 형량이 무거운 사건의 자백은 듣지 말라는 말이 있다. 간첩 사건으로 잡히면 최소 무기징역이다. 법정에서 진술을 뒤집으면서 ‘검찰이 용공 조작하려 했다’ ‘고문 때문에 허위 자백했다’고 주장하려는 것이다.”
―사실 시국사범 수사 과정에서는 고문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검찰의 수사기록은 증거능력이 인정된다. 이를 뒤집으려면 고문 주장밖에 없다. 따라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수사를 했다는 내용을 수사기록 중간 중간에 안전장치로 심어둔다. 서 전 의원 사건을 예로 들면 서 의원이 수사 도중 잘 때 ‘목침을 달라’고 요구했다. 목침이 없어 내 법전을 빌려줬더니 그것을 베고 잤다. 다음날 수사에서 ‘피의자는 어젯밤 법전을 베고 잔 사실이 있느냐’ ‘그렇다. ○○출판사에서 ○○년도에 출간한 법전을 베고 잤다’는 기록을 남겨뒀다. 법정에서 ‘잠도 재우지 않았다’는 등 인권침해 주장을 막기 위해서다.”
―공안검사로서 가장 힘든 점은….
“아무도 내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안사건은 잘못되면 체제를 위협할 만큼 피해가 엄청난데도 눈에 보이는 피해자가 없다. 법정에서 피의자의 지인들밖에 없다. (이 때문에) 국보법이나 한총련 문제는 일반 국민들의 공통 관심사가 될 수 없다.”
이 검사는 인터뷰 말미에 “기자와 검사의 공통점이 무엇인 줄 아느냐”고 물었다.
“박수받기 힘든 직업이라는 점이다. 폭탄주 마실 때만 빼고….”
●신신공안 시대?
그러나 폭탄주 때문에 구속된 공안검사도 있다. 99년 진형구 대검 공안부장이 술자리에서 한 말이 ‘조폐공사 파업유도 사건’으로 비화했다. 법원은 ‘파업유도는 없었다’고 결론 내렸지만 이 사건으로 국민의 정부가 내세운 ‘신(新)공안’ 개념은 만신창이가 됐다.
신공안은 ‘질서와 인권이 함께 숨쉬는 사회를 만들자’는 게 기본 취지였다. 요즘 검찰 안팎에서는 참여정부가 됐으니 이제는 ‘신신공안’이라고 불러야 하느냐는 비아냥 섞인 소리가 나온다.
386세대인 B검사에게 물었다.
―민주화된 세상에 공안부가 필요한가.
“사회주의 체제로 바뀌더라도 공안부는 있어야 한다. 일본에도 검찰 조직에 공안부가 있으며 명칭도 우리처럼 ‘공안’이라고 부른다. 미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에도 우리말로 ‘공안’이나 ‘보안’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조직이 있다. 신공안이니 신신공안이니 하는 것은 말장난이다. 공안은 공안일 뿐이다.”
―그럼 한총련 합법화 문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한총련은 현실적 위험은 없지만 잠재적 위협은 크다. 한총련 강령을 분석해 보면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과 이들이 추구하는 변화의 방향이 불온하다. 김정일도 ‘믿을 것은 한총련밖에 없다’고 했다. 그리고 요즘 같은 세상에 전국적인 대학 조직이 필요한가.”
B검사는 국보법 개폐론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취임 직후 국보법 개폐 작업을 지시해 여론조사를 한 적이 있다. 여론조사에서 ‘국보법을 개정 또는 폐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응답자의 대다수가 ‘그렇다’고 답했다. 이번에는 질문 문항을 달리해 ‘공산주의자의 활동을 허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거의 대부분이 ‘아니다’고 답했다. 그래서 개정하지 않았다. 일반 국민 가운데 한총련 강령이나 국보법 내용을 읽어 본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386세대 검사의 보수성
―386세대이면서 보수적이다.
“남북 교류는 통일부나 외교통상부가 하면 된다. 공안부가 할 일이 아니다.”
노동 관련 사건을 주로 수사해 온 C검사도 386세대이면서 보수적이었다.
―공안부에서 왜 노동 사건을 담당하는가. 노동 운동은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 아닌가. 로 사회 불안을 일으키는 집단행동이라고 보기 어렵지 않은가.
“예전에는 반체제 인물들이 위장취업 등을 통해 노동계에 많이 침투했고 이 때문에 공안부에서 노동 사건을 다뤄왔다. 지금은 경제투쟁으로 많이 돌아섰지만 민주노총은 이라크전 파병 반대를 외치고 있다.”
―새 정부의 엘리트 그룹으로 떠오른 사람들이 386세대다. 그들과 연배가 같은데도 생각이 많이 다르다. ‘친정부적’이라고 비난받던 공안 검사들이 이제 ‘반정부적’이 된 것 같다.
“나도 대학 시절 학생운동을 했지만 막상 관련 업무를 맡다보니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그 사람들도 정권을 잡아 일해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그래서일까. 민주화 투사 출신인 김대중 전 대통령 시절에 국보법 개정은 없었고 공안부 무용론이 나오지도 않았다.
D검사는 “국민의 정부는 자민련과의 공동 정부인 데다 김 전 대통령의 레드 콤플렉스 때문에 공안업무에 손대지 않은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현 정부는 국민의 정부와 또 다르다. 국보법에 대해 검찰총장과 법무장관이 다른 목소리를 낸다. 유례가 없는 일이다. 시대도 많이 달라졌다. 공안부 조직에 변화가 불가피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공안부가 없어지더라도 ‘악역’을 맡을 누군가는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공안검사란▼
공안(公安)은 ‘공공의 안녕과 질서’의 줄임말이다. 공안검사들은 대공 선거 학원 노동 외사 사건 등을 수사한다. 1100명이 넘는 검사들 가운데 약 10% 정도가 공안업무를 맡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1949년 검찰청법 제정 이후 1973년까지는 대검찰청 중앙수사국(현 중앙수사부)에서 공안업무를 담당했다. 1973년 대검찰청에 공안부가 생겼고 전국 각 검찰청에도 순차적으로 공안부가 설치됐다. 군사정권 시절 학생과 노동자들의 반정부 투쟁이 끊이지 않아 공안 ‘수요’가 폭증, 86년서울지검 공안부가 공안 1, 2부로 확대 개편되고 대검 공안부에 공안 3, 4과와 공안기획담당관이 신설됐다.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공안 검사들의 ‘수사대상’이 돼 온 야당 인사들이 권력을 쥐면서 공안조직도 흔들렸다. 국민의 정부는 인권을 중시하는 공안정책을 펴겠다며 ‘신(新)공안’이라는 개념을 발표하기도 했다. 신공안의 사령탑인 대검 공안부장을 비롯해 공안검사의 절반가량을 공안의 ‘때’가 묻지 않은 검사들로 물갈이했다.
하지만 1년여 만에 ‘조폐공사 파업 유도’ 사건이 터지면서 신공안은 실패한 실험이 됐다. 그 후 공안조직도 대검 공안 4과가 폐지되는 등 축소됐다. 새 정부 들어서는 ‘공안검사 무용론’이 나오고 있다.
대검찰청은 “공안 수요가 많이 줄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매년 전국적으로 5만건 정도의 공안사건을 처리하고 있다”며 연도별 사건 처리량 증감 자료 등은 밝힐 수 없다고 답했다.
이진영기자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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