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때 쯤 프랑스에서 팩스가 왔다. ‘괴질’로 인해 요리사가 한국에 가기 어려우니 방한을 10월로 연기하자는 내용이다.”
이 호텔은 프랑스인 요리사를 초청해 푸아그라(거위간) 요리 행사를 가질 예정이었다. 행사 준비가 한창인데 요리사가 입국 예정일을 이틀 앞두고 방한 연기를 통보해 온 것.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에 대한 두려움을 감안하면 요리사의 결정은 십분 이해가 됐다. 또 사스로 인해 다른 분야에서 빚어지고 있는 차질에 비하면 거위간을 먹느냐 못 먹느냐는 사소한 문제일 수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한국에는 사스가 발생하지도 않았는데, 혹 한국을 바라보는 이 프랑스인 요리사에게 또 다른 두려움이 있었던 건 아닐까. 이를테면 북한의 핵 문제 같은….
동료 기자는 2월말 방한 예정이던 미국계 화장품업체 사장과 한국에서 인터뷰하도록 돼 있었다. 그런데 사장은 일본과 한국 방문 일정 가운데 한국 행만 방문 직전에 전격 취소했다.
동료는 그를 인터뷰하기 위해 예정에 없던 일본 출장을 가야 했다. 사장은 한국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9·11테러 이후 비행기 타는 게 무서워 해외출장을 꺼리게 됐다”고 해명했다. 그런 그가 일본에는 ‘비행기를 타고’ 왔다.
기자들과 한국지사 관계자들은 북한 핵 문제 때문에 방한을 취소했을 거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 당시 미국 언론은 북한 핵 문제를 비중 있게 보도하고 있었다.
작은 사례이긴 하지만 이런 사례들이 한국의 ‘컨트리 리스크(Country Risk)’를 나타내는 단적인 예가 아닐까 자문해 봤다. 경제력과 소비 규모가 커져도 늘 외국인들에게 ‘위험한 나라’로 비치는 바람에 유형 무형의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게 한국의 현실이다.
‘컨트리 리스크’는 주로 금융 시장에서 사용되는 용어다. 외국의 자산에 투자할 경우 각종 투자 위험 외에 고려하는 그 국가 고유의 위험을 말한다. 예를 들면 전쟁, 쿠데타 등이 일어나 법질서가 파괴되거나 사기업이 몰수돼 국유화될 가능성 등이다.
한국의 경우 분단 현실 때문에 ‘컨트리 리스크’가 항상 높은 편이다. ‘컨트리 리스크’에는 외채 변제 능력, 외화 보유 규모, 1인당 국민소득 등 경제적 요소에다 정치적 안정성 같은 사회적 요소까지 포함된다.
사스 파장이 가라앉고 이라크 전쟁이 끝난 뒤 한국의 ‘컨트리 리스크’는 어떻게 될까. 10월에는 프랑스 요리사가 만드는 푸아그라 요리를 맛볼 수 있을까.
금동근 기자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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