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리포트][음식]고유음식 지키기…'슬로우 푸드' 운동 열기

  • 입력 2003년 4월 10일 16시 49분


슬로우 푸드 문화를 전파하는 기관인 ‘슬로우 푸드 USA’의 홈페이지(www.slowfoodusa.org) 첫 화면에 올라 있는 사진. 뿌리가 달려 있는 유기농 야채를 날것으로 먹는 모습을 통해 슬로우 푸드 문화의 개념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슬로우 푸드 문화를 전파하는 기관인 ‘슬로우 푸드 USA’의 홈페이지(www.slowfoodusa.org) 첫 화면에 올라 있는 사진. 뿌리가 달려 있는 유기농 야채를 날것으로 먹는 모습을 통해 슬로우 푸드 문화의 개념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뉴욕은 요리를 하지 않는 사람들의 도시다. ‘자가트’ 등 식당소개 책과 각종 간행물들에는 맛좋은 집, 이색 인테리어 식당, 각국 토속음식점이 빼곡히 들어 있다. 한 주간지는 ‘뉴욕의 최고’라는 제목으로 ‘백수들이 가기 좋은 식당’ ‘게이들에게 좋은 식당’ ‘유명인사의 비서를 만나기 좋은 식당’ 등등의 표현을 써가며 식당이나 술집 분위기를 소개한다.

좀 바쁜 사람들은 패스트 푸드점을 찾는다. 맥도널드나 서브웨이 버거킹 웬디스 등은 손님이 기다리는 시간을 줄이는 경쟁을 벌이고 있다. 더 바쁜 사람은 길가 카트에서 핫도그 베이글 또는 조각피자와 커피를 사먹을 수 있다. 길을 걸으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다 먹어도 뭐랄 사람이 없다. 그런데 “그렇게는 하지 말자”는 사람들이 있다. 패스트 푸드 간판이 늘어나는 데 놀라 ‘슬로 푸드(Slow Food) 운동’을 벌이는 사람들이다.

“대량생산과 공업화에 밀려나는 각 지방 고유의 음식을 지키자는 것입니다.” 세계 슬로푸드운동 미국대표인 뉴욕의 제닌 루리는 이렇게 말한다. “각 지역에서 곡식을 자라게 하는 기후와 땅에 존경을 표하자”면서. “가장 좋은 재료와 양념을 쓰고 시간을 갖고 요리를 하자”면서. “그리고 그 맛을 즐기자”는 것이다.

뉴욕의 700여 슬로우푸드 회원들은 뉴욕주 북부의 유기농 야채 농장과 맨해튼의 식당을 연결해주기도 하고 학교를 돌며 요리의 즐거움을 학생들에게 교육하기도 한다. 바쁜 세상에 슬로푸드운동을 따라 하는 게 가능할까. 이 단체는 “아주 쉽다”고 대답한다. “가족과 친구들 앞에 요리를 펼쳐놓고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는데 말이야’라고 이야기를 꺼내기만 하면 된다”는 것. 다음엔 그 지역의 농부를 초청해 이야기를 나누고 농장을 방문해 보라는 것이다. 그러고는 누군가의 할머니에게 옥수수죽이나 오렌지 잼 같은 것을 어떻게 만드는지 가르쳐달라고 하란다.

가족 및 친구들과 천천히 인생을 즐기면서 살라는 것이다. 하루는 파스타를 만들어보고 신선한 오렌지를 가지고 직접 주스를 짜보기도 하고 와인 한 잔과 치즈 한 조각을 놓고 수다를 떨어보라는 것이다. “만일 이런 시간이 없어도 최소한 점심을 서서 먹지 말고 앉아서 먹으라”고 뉴요커들에게 권하고 있다.

특히 10여년 전엔 미국에 부시와 밀러 등 2개 브랜드의 맥주가 휩쓸었는데 지금은 1600개 마이크로브루어리(지역별 소규모 맥주공장)가 활발히 영업 중인 점도 이들 슬로푸드 지지자들에겐 좋은 징후다. 대형 슈퍼마켓 사이사이에 파머스 마켓(Farmers' Market)이 늘어나는 것도 이들에겐 고무적이다. 파머스 마켓은 유기농산물을 파는 가게로 일요일이면 맨해튼 한복판 간이시장에서 싼값에 농산물을 팔기도 한다.

이 단체는 세계화 속의 지역 음식에 주목한다.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국경 개념이 점차 사라지기 때문에 음식이야말로 지역사회의 정체성을 따지는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이 단체는 뉴욕시 음식기행 프로그램을 만들어 오래된 거리의 작은 식당들을 여행객들에게 소개하기도 한다. 그 대상은 △브롱크스의 아서 애비뉴의 이탈리아 식당 △퀸즈 잭슨하이츠의 루스벨트 불러바드의 남아시아 식당 △맨해튼 할렘의 흑인음식점 △차이나타운의 만두와 딤섬 △브루클린 보시트벨트의 러시아 식당 등이다.

세계 슬로푸드운동은 1986년 이탈리아에서 시작됐다. 패스트 푸드의 상징인 미국의 맥도널드가 로마에 진출하려 하자 반대운동이 벌어졌고 브라라는 작은 도시에 운동본부가 만들어졌다. 작은 도시의 식당과 와인생산자를 보호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다 1990년대 중반 광우병 등의 여파로 자연식품과 유기농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 운동이 세계적으로 번지게 됐다. 창립자 카를로 페트리니는 “100년 전 사람들은 100∼120종류의 음식을 먹었는데 우리는 겨우 10∼12개”라고 지적한다. 세계인이 똑같은 음식을 먹지 말고 사라져가는 지역음식을 살려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효율성에 흥분해 대중이 (패스트 푸드에) 감염되는 것을 막자’는 내용의 ‘선언문’을 갖춘 이 단체는 현재 45개국에 6만5000여 회원을 갖고 있다. 그중 절반이 넘는 3만5000명이 이탈리아인이다. 미국에서도 이 단체의 상징물인 달팽이처럼 회원이 ‘천천히’ 늘어나고 있다.

홍권희기자 koni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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