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이별한 다음날, 고구마를 삶아 먹던
허기는 가난하다
고구마를 찌르던 젓가락은 가난하다
고구마를 제 몸 안으로 삼키던 창자는 가난하다
사랑한다면서 손이 어여쁜 여인은 가난하다
시간이 없어서 밤낮 고단한 사람은 가난하다
가난해서 이별하는 사람은 가난하다
가난 때문에 가난해진 사람은 가난하다
가난함으로 인해 전혀 가난하지 않게 된 사람은 가난하다
낙엽진 단풍나무에게서 앙상한 가지만을 기억하는
눈은 가난하다
가난하다고 말하는 이 엄살은 가난하다
가난보다 더 빈곤하다
-조하혜 ‘가난하다’
6년 전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에 들어갈 때 일부 지식인들은 차라리 잘 되었다고 말했다. 성장 제일주의의 그늘을 직시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모색하는 계기로 삼자는 것이었다. ‘가난하고 느린 삶’을 육화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희망일 따름이었다. 곳곳에서 외환위기 때도 이러지는 않았다는 신음이 들려온다. 전쟁 불황. 가난이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처럼 퍼지고 있다.
그래도 어김없이 봄은 오고 풀과 나무들은 있는 힘을 다해 꽃을 피우고 있다. 춥고 배고픈 서민들은 희고 노랗고 붉은 봄꽃들을 보며 ‘꽃멀미’를 일으킨다. 만개한 봄꽃과 자신의 궁핍한 삶이 무관한 것이다. 젊은 여성 시인 조하혜의 ‘도넛, 비어있음으로 존재한다’(천년의시작)를 넘기다가 ‘가난하다’라는 시 앞에서 멈추고 말았다. 그렇다. 가난은 언제나 화두였다. 기필코 풀어내야 할 절체절명의 질문으로서의 화두.
새벽에 일어나 양말부터 찾아야 하는 삶은 얼마나 처량한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고구마를 삶아먹는 저 ‘허기’라니. 가난은 가난한 사람을 더욱 가난하게 만든다. 가난의 악순환. 그런데 시인은 가난 자체보다는 가난에 대한 엄살이 사태의 핵심이라고 지적한다.
조하혜의 시는 불화와 적의의 시이다. 세계에 대한 불화와 적의는 시적 자아의 도저한 자의식에서 나오는데 시적 자아는 세계와 단절된 불구적 존재이다. ‘나는 나라는 액자’이며 ‘센서가 고장난 인간’이다. ‘나’는 ‘다 익으면 툭하고 벌어지는 밤송이처럼’ 세계와 교감하고 싶지만 ‘나’는 ‘그대들의 창 밖의 여자’이다. 환멸 망상 착란 자학 야유 방황이 끝말 이어가기처럼 이어지며 불화와 적의를 강화하는데 놀랍게도 그 언어들은 싱싱하다. 도발적이다. 도넛의 텅 빈 속, 즉 세계의 이면을 발견하는 시인의 눈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봄꽃 사이, 도처에 가난이 보인다. 가난하다는 엄살, 아니, 가난에 대한 공포가 보인다. 사실 가난이라는 화두는 그렇게 무겁지 않다. 나는 이렇게 풀었다-가난한테 끌려 다니기 전에, 내가 먼저 가난을 선택한다. 자발적인 가난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사유가 아니다. 결단이고 실천이다. 나는 아직 ‘가난보다 더 빈곤’한, 엄살과 공포의 상태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이문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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