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자원부 농림부 외교통상부 교육인적자원부 문화관광부 등 관계 장관들이 편을 갈라 열띤 토론을 벌였기 때문이다. 교육시장 개방을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출할 서비스 개방 양허안에 포함시킬지 여부가 논란이 됐다.
주무 부처인 교육부를 비롯해 국내 시장 개방에 민감한 농림부 문화부 장관이 한 편에서 “반대”를 외쳤고, 재경부 산자부 외교부 장관은 대승적 차원에서의 “찬성”을 주장했다. 논쟁이 격해지면서 장관들이 내뱉는 고성이 회의실 바깥까지 들리기도 했다.
문 밖에서 듣고 있던 한 관계자는 “과거에는 좀처럼 볼 수 없던 풍경”이라고 말했다. 예전의 대외경제장관회의는 미리 의견 조율을 한 다음 형식상 거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
공정거래위원회의 국장들도 지난달 낯선 경험을 했다.
강철규 위원장 취임 직후 처음 열린 간부회의 때였다. 회의가 시작되자 강 위원장은 프로젝터를 비추며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그는 각국의 기업 지배구조를 주제로 2년 전 썼던 논문의 내용을 보여주며 기업 지배구조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
강 위원장은 10분 정도 발표를 한 다음 “2년 전 내용이라 지금과 상황이 다를 수 있으니 의견을 달라”고 말했다. 즉석 토론회가 열렸고 국장들은 평소 생각을 제시했다.
예고되지 않았던 위원장의 프레젠테이션이었고 간부회의 때 토론이 벌어진 것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보고’와 ‘지시’가 주였던 간부회의 시절 국장들이 순서에 따라 업무를 보고하면 위원장은 각각에 대해 의견을 말하거나 지시하는 게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상명하복 문화가 뿌리 깊은 공무원 사회에 토론 바람이 서서히 불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추구하는 ‘토론 공화국’ 건설을 위한 ‘기초 공사’가 시작된 것일까. 요즘 각 부처에서는 토론의 긍정적 부정적 측면을 놓고 벌이는 구성원들의 ‘토론’ 또한 뜨겁다.
●관가에 부는 토론 바람
최종찬 건설교통부 장관은 “간부회의 때 보고서 대신 간단한 메모만 들고 참석하라”고 실국장들에게 주문했다. 보고서를 읽어 내려가는 식의 회의 방식을 바꾸겠다는 뜻이었다.
한 국장은 “억지로 보고 거리를 만들 필요가 없어져 좋지만 한편으로는 부담스럽기도 하다”고 말했다. 예상치 못했던 질문을 받는다거나 맡은 업무 외의 일에 대해서도 의견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이 닥칠 수 있기 때문.
최근 간부회의에서 ‘지속 가능한 물 관리 체제’를 주제로 공청회를 가질 예정이라는 보고가 있자 최 장관은 “공청회 참석자들이 댐 건설 계획의 타당성을 따지고 들 텐데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담당 국장이 나름대로 답변하자 최 장관은 “대충 넘어가려 하지 말고 예상되는 물부족 현상에 대해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하면서 이해를 구하라”고 말했다.
최 장관이 이런 식으로 현안을 근본 문제부터 따지고 들자 국장들 사이에선 ‘더 많이 공부해야겠다’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농림부도 김영진 장관이 취임한 뒤 간부회의 풍경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주요 내용을 서면으로 미리 제출하고 회의 때는 지난 주에 한 일과 이번 주에 할 일을 1분 정도씩 보고하는 게 전부였다.
그러나 김 장관은 어떤 사안에 대해선 “일부러라도 반대 의견을 제시해보라”고 주문해 국장들을 긴장시킨다. 한 관계자는 “장관이 4선 의원 출신이라 ‘반대 의견’을 자주 요구하는 것 같다”고 해석했다. 반대론자가 있게 마련인 국회의 난상토론 스타일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라는 것.
일부 장관들은 간부회의를 넘어 조직 전반에 토론 문화를 요구하고 있다.
윤영관 외교통상부 장관은 취임 후 두 차례에 걸쳐 ‘과장과의 대화’를 열었다. 한 참석자는 “젊은 직원들 특유의 과감한 얘기들이 나왔다”고 밝혔다. “외교부에도 세대교체가 필요하다” “4강 위주의 외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등의 의견이 제기됐다는 것.
이와 별도로 윤 장관이 북한 관련 부서 직원들을 모두 불러 모아 ‘북한 핵문제 토론회’를 가졌을 땐 “특정 부서가 북한 정보를 독점한다”는 볼멘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서열을 중시하고, ‘비밀주의’로 인해 부서간 벽이 높은 외교부에서 이 같은 내용의 토론회가 진행된 것에 대해 외교부 안팎에선 “상당히 파격적”이라는 반응이다.
최 건교부 장관은 사무관까지 포함한 실무자들과 점심 시간에 햄버거를 먹으며 토론을 벌이는 이른바 ‘햄버거 미팅’으로 이미 관가에 유명해졌다.
정세현 통일부 장관은 최근 “통일부 직원 모두가 상대를 설득할 수 있는 논리로 무장하고 토론을 통해 반대 논리를 명쾌하게 제압하라”고 지시했다.
●장관들, ‘토론의 달인’ 되려나
장관들이 이처럼 토론을 요구하는 것은 노 대통령이 토론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주재하는 국무회의는 과거에 비해 크게 달라졌다.
한 장관은 최근의 국무회의 분위기와 관련해 “언제 어떤 질문을 받을지 몰라 장관들이 적잖이 긴장한 상태에서 회의에 참석한다”고 전했다. 옛날 같으면 그냥 넘어갔을 문제에 대해서도 노 대통령은 이런저런 질문을 반복해서 던진다는 것. 또 전혀 관계없는 ‘엉뚱한’ 분야에 대해 의견을 밝혀야 해 곤혹스러울 때가 종종 있다고 이 장관은 밝혔다.
때로는 국무위원들 사이에 설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최근 대통령이 ‘국무회의 공개 검토’ 방침을 밝힌 데 대해 참석자들이 찬반 양론으로 팽팽히 맞섰던 게 단적인 예다. 내년도 예산, 3대 국정과제 담당 위원회에 참가할지 여부 등 각 부처의 ‘밥그릇’이 걸린 문제가 토론 주제로 올랐을 때는 공방이 치열했다.
토론문화가 자리잡으면서 과거 오전 10시에 시작해 1시간 반 정도 걸리던 국무회의가 길어졌다. 시작 시간이 오전 9시로 당겨졌고 점심 시간을 넘기는 경우도 잦다.
장관들의 회의 준비도 한층 치밀해졌다는 관측이다. 한 정부 관계자는 “장관이 국무회의 전날에는 다른 부처 현안까지 꼼꼼히 살펴본다”고 말했다. 또 어떤 부처에선 장관이 국무회의를 앞두고 부처 내 실무자와 함께 ‘모의 토론’을 하는 사례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대중 정부 때까지 ‘토론’은 차관들의 몫이었다. 차관급 회의에서 차관들은 자신이 속한 부처에 유리한 결과를 얻어내기 위해 난상토론을 벌였다. 이 같은 모습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장관은 차관 선에서 이미 조율돼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안을 들고 국무회의에 참석해 보고하면 됐다.
하지만 이제는 장관들이 어떤 문제에도 언제든지 의견을 낼 수 있는 ‘토론의 달인’이 되기를 대통령은 요구하고 있다.
●토론 문화의 앞과 뒤
토론문화 확산에 대해 일부 공무원은 “상명하복 식의 권위주의적인 분위기를 개선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수직적 결재 라인이 특징인 공무원 사회에 수평적 의견 교환 문화가 자리잡으면 경직된 문화가 한층 유연해질 것이라는 얘기다.
외교부의 한 관계자는 “외교부는 업무의 특성상 진작 토론문화가 활성화됐어야 한다”고 말했다. 국익증진을 위해 논리적으로 상대방을 설득해야 하는 게 외교 공무원의 기본 자질인데 토론은 이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는 얘기였다.
한 장관은 국무회의에 참석한 뒤 부하 직원들에게 “형식적인 국무회의가 국가 대사를 논의하는 실질적인 마당이 된 것 같아 좋다”고 말했다.
하지만 토론 문화의 역기능에 대한 지적도 적지 않다. 우선 시간을 많이 빼앗는다는 점. 한 고위 공무원은 “장관의 1시간을 돈으로 환산한다면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간을 들여서 토론해야 하고, 또 토론에 앞서 준비하느라 시간을 투자하는 것 역시 낭비라는 지적이다.
또한 회의 때 토론 주제에 오른 사안에 대해선 ‘과도할 정도로’ 깊은 얘기가 오가지만 그렇지 않은 사안은 시간이 없어 대충 넘어가는 점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토론 참석자들의 마인드다. 토론문화에 대해 의견을 밝힌 공무원들 가운데는 “우리나라 사람들 생리상”이라거나 “공무원들 생리상”이라는 말을 꺼낸 사람이 적지 않았다. 남의 일에 참견하는 것을 꺼리는 ‘생리’가 바뀌지 않는 한 실질적인 토론이 진행되겠느냐는 의문을 제기한 것.
자칫하면 ‘윗사람’의 눈치를 보느라 토론을 하긴 하지만 ‘토론을 위한 토론’에 그칠지 모른다는 우려였다. 어떤 이는 “결론을 내기 위한 토론도 아니고 각자 주장만 펼치다 끝나는 토론은 별 의미가 없다”고 비판했다.
한 공무원은 “역대 어느 정권 때나 초기에는 토론이 강조되곤 했다”는 말로 토론을 강조하는 최근 분위기에 대한 의견을 밝혔다. 실제 김영삼 전 대통령도 집권 초기 국무회의를 토론 무대화하겠다고 공언했고 김대중 전 대통령도 초기에 ‘국민과의 대화’ 같은 TV 토론을 시도하면서 토론문화 창달을 외쳤지만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또 공무원 사회에서 ‘토론 문화 정착’은 결국 윗사람의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국장이 과장, 사무관 등 실무자들을 방으로 불러 토론을 벌이는 것은 이미 흔한 일이라는 것. 결국 ‘보고를 받고 지시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만 바뀌면 굳이 토론 문화를 애써 강조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금동근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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