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10월 어느 날, 라디오 뉴스를 듣던 재무부 간부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당시는 재무부 관료들이 파워와 승진 등 모든 면에서 다른 부처를 압도하던 시절, 한마디로 ‘재무부 마피아’의 전성기였다. 그들의 수장에 ‘백면서생(白面書生)’이 임명된 것이다.
재무부 간부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 방에 모여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의논했다. 그러나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교수 출신이 몇 달이나 가겠느냐. 몇 달만 잘 모시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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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몇 달은 재무부 간부들의 예상이 들어맞는 것처럼 보였다. 업무는 둘째 치고 서기관과 사무관을 구분 못해 허둥대는 장관이 오래갈 리 없었다.
그러나 오래 못간 것은 남 장관이 아니라 그들의 예상이었다. 남 전 총리는 1969년 10월부터 74년 9월까지 만 5년 동안 재무부 장관을 지낸다. 또 곧바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승진해 4년4개월 동안이나 자리를 지킨다. 유례가 드문 장수 비결은 뭘까. 남 전 총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인사입니다. 인재를 적소에 배치하지 않으면 우선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또 인사에 불만을 가진 사람이 생기면 어딘가에 험담을 하게 됩니다.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오면 장관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도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인사를 하다 보면 불만이 없을 수 없지만 세 가지 원칙만 철저히 지키면 불만을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원칙은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에게서 배웠다.
그가 장관에 임명된 지 얼마 안돼 청와대에서 대통령이 주재하는 한 모임이 있었다. 여기서 박 대통령은 “장관 인사는 내가 하지만 차관 인사는 장관 뜻에 따르겠다”고 선언했다.
이를 계기로 남 장관은 은행의 부장급 인사권을 은행장에게 넘겨줬다. 당시는 재무부 장관이 은행 부장급 인사를 하고 개별 대기업의 여신까지도 구두로 결재하던 시절이었다.
남 전 총리는 “평소 관찰할 수 있는 범위 밖에 있는 사람에 대해 인사권을 행사하면 여러 가지 ‘연(緣)’이 개입하고 무리가 따른다”고 강조했다.
그의 두 번째 인사 원칙은 정평(定評)에 따른다는 것.
“공직사회는 어느 부처를 막론하고 정평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내 경험으로는 정평에 따라 인사를 하면 나중에 ‘과연 옳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만 부처의 장이 직원들에 대한 정평을 파악하는 데는 6개월 정도 걸립니다. 그런 점에서 장관을 너무 자주 바꾸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서석준(徐錫俊) 최각규(崔珏圭) 이경식(李經植) 정재석(丁渽錫) 강경식(姜慶植) 이규성(李揆成) 강봉균(康奉均) 이헌재(李憲宰) 진념(陳稔) 전윤철(田允喆)씨 등이 ‘정평’에 따라 중용됐던 대표적인 경제 관료들. 이들은 모두 나중에 경제팀 수장을 지냈다.
세 번째 원칙은 정평에 따른 인사를 하기 위해선 압력에 초연해야 한다는 것.
남 장관은 70년 2월 공직기강을 세우기 위해 재무부 특별감사반을 동원해 일선 세관에 대한 대대적인 숙정작업을 벌인다. 결과를 놓고 인사 조치를 논의하던 중 핵심 실세에게서 한 명을 선처해 달라는 전화가 걸려왔다. 남 장관은 고민 끝에 다음날 새벽 그 실세의 집을 찾아가 인사 조치의 불가피성을 설명하고 양해를 받아냈다.
그는 “처음에는 압력을 물리치기 힘들지만 뜻을 분명히 하면 나중에는 압력 자체가 없어진다”고 말했다.
천광암기자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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