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첨자들은 의외로 덤덤하고 조용하다. 표정관리를 하는 탓도 있겠지만 굴러온 복이 순식간에 날아가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로또 복권의 위조 여부를 확인하는 데 걸리는 10여분간은 긴장감이 가장 고조되는 순간. 대부분의 당첨자들은 잡지와 커피잔을 손에 들고 애써 여유로운 표정을 짓는다. 더러는 “빨리 당첨금을 달라”고 재촉하기도 한다.
최근 407억원에 당첨된 박모씨(39)는 순박한 인상에다 처음에는 말도 별로 없는 ‘덤덤형’이었다고 한다. 신원 확인을 담당한 국민은행 이인영(李寅英·47) 복권사업팀장은 “수수한 양복차림에 회사원이라고만 하기에 경찰관인 줄도 몰랐다”고 말했다.
이 팀장은 1시간가량 재테크 컨설팅을 해 주면서 박씨에게서 몇 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다음은 박씨가 이 팀장에게 털어놓은 당첨 사연.
“돌아가신 아버지의 혼이 도와 주신 것 같아요. 로또를 사기 전날 어머니, 막내동생과 아버님 산소를 찾아가 사람 머리 깎을 때처럼 정성스럽게 벌초했거든요. 장남으로 아버지 대신 집안 생계를 꾸리느라 대학을 못 갔습니다. 농고를 졸업하고 한동안 농사를 지었죠. 그래도 귀가 잘 생겨서 재물이 따르는 ‘복귀’라는 소리는 많이 들었어요.”
박씨와는 달리 극도로 말을 아끼며 돈만 챙겨 사라지는 ‘묻지 마’형도 있다. 당첨 번호가 아닌데도 당첨된 걸로 착각해 사무실을 찾아오는 ‘김칫국 마시기’형도 간혹 나타난다. 가족들까지 데리고 돈을 받으러 왔던 한 남성은 당첨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크게 민망스러워 했다고 한다. 변하는 가족들의 표정과 실망스러운 눈초리 역시 옆에서 보기 안쓰러웠다고.
가장 보기 좋은 유형은 행복감을 자연스럽게 표시하는 ‘스마일형’. 대부분 남루한 옷차림을 한 이들은 “이제는 허리 펴고 살 수 있게 됐다”며 수차례 감사의 말을 반복한다.
3000만원에 당첨된 시골의 한 40대 아주머니는 당첨금을 받은 자리에서 친구에게 절반을 떼어줬다. 그리고는 “마을로 돌아가서 동네 사람들과 잔치를 해야 한다”며 발걸음을 서둘러 보는 사람들을 흐뭇하게 했다.
복권사업팀 한희승(韓熙承·38) 과장은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을 보면 행운 전달자로서 보람을 느낀다”며 “407억원 당첨자의 경우 비밀 유지를 위해 온갖 신경을 썼는데 스스로 당첨 사실을 공개해 버려 너무 허탈했다”고 말했다.
이정은기자 lightee@donga.com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