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버킹검궁엔 근위병 덕수궁엔 공익요원

  • 입력 2003년 4월 24일 17시 21분


서울 시청앞 덕수궁에서는 월요일을 빼고 매일 ‘왕궁 수문장 교대 의식’이 열린다. 긴 칼을 들고 덕수궁 입구인 대한문(大漢門)을 지키고 있는 ‘조선시대 병사들’은 대부분 공익근무요원들이다. 흔히 생각하듯 ‘국군 의장대’나 ‘아르바이트 대학생’이 아니다.

최용혁씨(25)도 대한문을 지키는 공익요원이다. 최씨가 소속된 곳은 서울시청 관광과로 30여명의 동료 공익요원들과 함께 일한다.

● ‘계급’이 있는 공익요원

원래 공익요원에게는 계급이 없다. 4주간 군사훈련을 마친 뒤 받는 이등병 계급이 처음이자 끝이다. 훈련이 끝나면 다시 민간인 신분으로 돌아가 근무하기 때문이다. 같은 곳에서 일하는 공익요원들은 ‘동료 요원’일 뿐이다. 그러나 대한문을 지키는 ‘공익 병사’에겐 계급이 있다. 군대식 진짜 계급이 아니라 ‘짬밥’ 순에 따라 계급이 다른 배역을 맡기 때문이다.

한 공익요원이 교대의식을 관람한 외국인 관광객들이 사진촬영을 위해 조선 병사 복장으로 갈아입는 것을 도와주고 있다.신석교기자 tjrry@donga.com

최씨는 “조선시대의 계급에 맞춰 ‘진급’한다”고 소개했다. 높은 계급일수록 ‘폼’도 나고 편하기 때문에 당시 계급 체계를 그대로 따른다는 것.

하늘색 도포를 입은 수문군(守門軍)은 수가 가장 많고 ‘폼’이 덜 난다. 자연히 신참들의 몫. 일반 군대에서 같은 ‘일병’끼리 호봉을 따지듯 수문군 내에도 서열은 있다. 긴 방망이 형태의 능장(稜杖)을 든 능장수가 제일 아래. 그런 다음 자루가 긴 칼, 협도(夾刀) 를 드는 협도수, 수문군의 깃발인 영기(令旗)를 담당하는 영기수 순으로 올라간다.

궁궐 앞을 지키는 수문군들은 교대의식이 치러지는 매일 오후 2시부터 3시반까지 줄곧 부동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그 시간 동안 2교대를 하지만 한 여름에는 일사병으로 쓰러지는 사람도 있다.

군대의 ‘상병’쯤에 해당하는 계급은 취라군(吹螺軍)과 녹사(錄事). 취라군은 나발, 용고(龍鼓) 등을 연주하는 병사. 지금의 군악대에 해당한다. 녹사는 군인이 아닌 하급 관리직이다.

취라군에서 용고를 두드리는 서장원씨(22)는 “교대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세 차례 의례 때만 잠깐 나왔다가 다시 막사에 들어가 쉴 수 있기 때문에 계속 서 있어야 하는 수문군보다는 편한 배역”이라고 말했다. 녹사는 교대의식이 치러지는 동안 행사장 주변에서 관광객들을 안내하는 일을 한다. 자유롭게 왔다 갔다 할 수 있으므로 역시 수문군보다는 편하다.

고참들은 주서(注書), 사약(司약), 엄고수(嚴鼓手) 역을 맡는다. 주서는 비서실에 해당하는 승정원의 관리, 사약은 궁문의 열쇠를 담당하는 액정서의 하급직원이다. 엄고수는 교대의식의 시작부터 단계마다 북(엄고)을 울려 의식의 진행을 이끄는 사람.

이들은 대한문 안쪽 한 모퉁이에 자리를 잡고 앉아 쉬다가 교대의식이 진행되는 동안만 잠시 얼굴을 비친다. 고참으로서의 여유를 나름대로 누리는 것. 녹색, 빨간색 복식을 착용해 눈에 띄는 데다 교대의식의 절차상 관람객들의 눈길을 끄는 역할이다. ‘폼’나는 배역이라는 얘기다.

공익요원들의 ‘진급’은 여기까지다. 핵심 배역이면서 계급이 높은 수문장(守門將)과 그를 보좌하는 참하관(參下官)은 시청에서 고용한 이벤트업체 소속의 ‘전문 연기자’들이 맡는다. 나름대로 연기력이 필요한 배역이기 때문. 군대에서 일반 사병의 진급은 병장까지고 그 이상은 ‘직업군인’의 몫인 것처럼 이곳에서도 높은 계급은 ‘프로’가 차지하는 셈이다.

이처럼 계급이 구분되지만 일상생활에서 조선 병사의 계급을 호칭으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고참을 부를 때는 ‘○○○ 고참님’이며 아래 사람을 부를 땐 그냥 이름을 부른다.

● ‘군기’도 있다

군인사회가 아닌 이 곳에도 나름대로 ‘군기’는 있다. 최씨는 “행사 때 실수가 없도록 하려면 평소 어느 정도의 ‘군기’를 잡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아랫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고참들의 “의자 깔아”라는 한 마디. 서울시청 별관 뒤편에 있는 컨테이너 막사에 접이식 의자를 모두 펴놓고 ‘교육 대형’으로 앉으라는 얘기다. 교대의식 행사가 끝난 뒤 쉬지도 못하고, 때로는 퇴근 시간을 넘겨서까지 교육이 실시되므로 가장 피곤한 일이다. 이들의 퇴근 시간은 오후 6시.

단체가 아닌 개인에 대한 ‘처벌’도 ‘교육’이다. 다른 사람이 쉬는 동안 행사 때 틀렸던 동작을 계속 반복하게 하는 것. 한 공익요원은 “앞장서서 수문군을 인도하는 영기수를 할 때 한번은 동선(動線)을 잘못 잡는 바람에 모두들 엉뚱한 길로 간 적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그 날 그는 행사가 끝난 뒤 퇴근 때까지 걷는 연습을 반복했다.

행사와 관련 없는 일로 처벌을 받는 경우도 있다. 특히 지각을 하거나 근무 중 막사 주변을 벗어나는 ‘무단 이석’을 할 때 가장 엄중하게 처벌 받는다. 지각의 경우엔 다음 날 출근 시간보다 일찍 출근하도록 하는 것으로 처벌한다. 정식 출근 시간은 오전 9시. 이같은 일로 정해져 있는 규정에 따라 처벌을 받긴 하지만 구타나 ‘얼차려’는 없다.

‘군기’는 말투와 용모에서도 나타난다. 후배들이 고참들에게 말을 할 때 ‘∼요’로 끝내는 경우는 없다. 민간인들인데도 군대식으로 ‘∼다’나 ‘∼까’로 말을 끝내는 것. 최씨는 “군대식 말투를 따라하려고 의도한 것은 아닌데 쓰다 보니 그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굳어 버렸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야기 중간 중간에 막 배치된 공익요원들을 ‘신병’이라고 불렀다.

이 같은 ‘군기’가 깔려 있어서인지 이곳 공익요원들의 생활에선 군대식 문화가 곳곳에서 엿보인다.

군인들이 휴식 시간 동안 가장 공을 들이는 일 가운데 하나가 군화에 광을 내고, 다림질로 군복에 ‘각’을 잡는 것. 총기 소제도 빼놓을 수 없는 일이다.

이곳 공익요원들은 군화 대신 행사 때 신는 목화(木靴)를 닦는다. 김회술씨(26)는 “워커를 닦는다”고 표현했다. 각자 행사 때 입는 자기 옷은 수시로 다림질을 한다. 옷이 구겨져 있으면 위로부터 ‘난리’가 난다. 그리고 총 대신 행사 때 사용하는 칼을 닦는다. 칼을 포함한 쇠붙이 부분을 닦을 땐 광택제를 사용해 광을 내야 한다.

군인들이 총을 들고 제식 훈련을 하는 시간에 이들은 협도, 영기, 능장 등을 들고 막사 앞 마당에서 제식 훈련을 한다.

군대식 문화가 가장 잘 드러나는 때는 출근 시간 후배들이 고참들에게 인사를 할 때. 후배들은 막사에서 고참을 만나면 “충성”이라는 구호와 함께 거수 경례를 한다.

● “군인은 국토수호, 우린 한국홍보”

지난해 월드컵 기간 프랑스에서 온 한 가족이 덕수궁을 방문했다. 수문장 교대의식을 지켜본 이들은 가족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프랑스어를 알아듣지 못할까봐 행인들에게 부탁하지 못하고 눈치만 살폈다.

스위스, 영국에서 중고교와 대학을 나와 영어 프랑스어에 능통한 최용혁씨가 다가가 프랑스어로 말을 걸었다. 프랑스인 가족은 모국어를 구사하는 사람을 만났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최씨의 안내를 받으며 가족사진을 찍은 뒤 그들은 “메르시(고맙다)”를 반복했다. 최씨는 “이 일을 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라고 말했다.

덕수궁에 배치되는 공익요원들은 처음에는 ‘그냥 주어진 일이니까 한다’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일종의 ‘사명감’이 생긴다고 입을 모았다.

“주차 딱지를 떼고 다니는 공익들은 운전자들과 싸우기도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곳에서 일하는 공익요원들은 외국인들에게 우리 문화를 알리는 일을 하고 그들로부터 박수를 받습니다.”

정낙윤씨는 “추운 날 고생한다며 할머니들이 손을 잡아 주기도 하고 어떤 어른들은 간식 사 먹으라며 1000원짜리 한 장을 꺼내놓기도 한다”고 말했다.

외국인들이 공익요원의 도움을 받아 수문장 복장으로 사진 촬영을 마친 뒤 팁을 건넬 때도 있다. 하지만 근무 규정상 팁은 받지 않는다.

이들은 외국인 관광객이 많다는 점을 고려해 어학 공부에도 힘을 기울인다. 영어, 일어 등 외국어 실력이 뛰어난 사람이 다른 공익요원들을 모아 놓고 자체적으로 교육을 실시하는 것. 1월 초부터 3월 중순까지 혹한기에는 교대 의식이 없어 외국어 태권도 등 교육이 집중적으로 이뤄진다.

창덕궁 돈화문에서도 공익요원을 활용해 수문장 교대의식을 진행하는 서울시청 관광과는 이 같은 대외 홍보 효과를 감안해 병무청에 인원을 요청할 때 엄격한 기준을 제시한다. 우선 키가 175㎝ 이상이어야 한다. 또 원칙적으로는 ‘안경 미착용자’를 요청하지만 일부 공익요원들은 콘택트렌즈를 착용하고 근무한다.

그 정도 신체 조건을 가진 이들이 왜 현역병이 아닌 공익근무요원으로 근무하는지 궁금했다. 최씨는 “어깨뼈가 상습적으로 빠진다는 이유로 신체검사에서 4급 판정을 받았다”면서 “나머지도 대부분 겉은 멀쩡하지만 한 가지씩 속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털어놓았다. 몇 년 전에는 허리가 좋지 않던 한 공익요원이 날마다 반복되는 부동자세로 인해 병이 악화된 적도 있다고 최씨는 말했다.

금동근기자 gold@donga.com

▼공익요원 Q&A▼

길거리나 관공서에서 자주 마주치게 되는 공익근무요원. 2003년 4월 현재 6만7000여명의 공익요원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의 지위나 하는 일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공익요원에 대한 여러 궁금증을 풀어본다.

―공익요원은 군인인가.

“아니다. 과거 방위병은 군인이었지만 공익요원은 공익근무로 병역의 의무를 대신하는 것일 뿐 신분은 민간인이다. 공익요원에게는 계급도 없다. 만약 이들이 범죄를 저지른다면 군법이 아니라 형법에 의해 처분받게 된다. 복무기간 중 보수, 복무원칙 등 기본적인 사항만 병역법의 규제를 받는다.”

―어떤 사람들이 공익요원이 되나.

“대개 신체검사에서 4급 판정을 받은 이들이 공익요원 대상이 된다. 공익요원은 크게 세 종류다. 일반적으로 구청 동사무소 등 관공서에서 볼 수 있는 ‘행정관서요원’이다. 이 밖에 예술·체육분야 특기를 가진 사람들로 구성된 ‘예술·체육요원’과 개발도상국가에 파견돼 현지에서 한국어 교육 등을 맡는 ‘국제협력봉사요원’이 있다. 야구 선수 박찬호나 바둑 기사 이창호는 예술·체육요원이다.”

―국제협력봉사요원이나 예술·체육요원은 어떻게 선발되나.

“국제협력봉사요원은 외교통상부 산하 한국국제협력단이 신청자 가운데 선발한다. 체육요원은 올림픽 3위 이내, 아시안게임 1위, 월드컵 16강 이상의 성적을 낸 운동선수다. 바둑 음악 무용 연극 분야 종사자 가운데 뽑히는 예술요원도 각 분야별로 세세한 기준이 있다. 예술·체육요원은 근무 기간에 자신이 종사하는 분야에서 34개월 동안 하던 일만 하면 병역 의무를 다한 것으로 인정한다.”

―공익요원 제도는 언제, 왜 시작됐으며 종전 방위병 제도와는 어떤 관계가 있나.

“공익요원 제도는 1993년 7월 국방부가 병역제도를 개선하면서 내놓은 방안이다. 1994년 말 방위병 제도 폐지가 확정된 상태에서 여러 이유로 현역병으로 입대하기 어려운 사람을 어떻게 흡수할 것인가 고민 끝에 만들어졌다. 이 제도는 방위병 제도 폐지 직후인 1995년부터 시행됐다. 현역병과 방위병의 복무 기간 차이를 없애는 대신 공익요원의 근무 형태를 군사업무가 아닌 일반업무로 조정했다.”

―공익요원 근무지는 어떻게 결정되나.

“국가기관, 지방자치단체, 사립학교를 포함한 공공단체나 기관, 사회복지시설 등에서 필요한 인원을 신청하면 병무청에서 심사를 거쳐 적절한 숫자의 공익요원을 배치한다.”

―군사훈련은 전혀 안 받나?

“소집된 날부터 4주(현역병은 6주) 동안 군사훈련을 받는다. 이 기간만큼은 신분이 군인이므로 군법 적용을 받는다. 그 뒤에는 군사훈련을 받지 않는다.”

―군인이 아니라면 ‘군기’ 등의 군대문화도 없나.

“전혀 없지는 않다. 경우에 따라서는 먼저 들어온 선임이 후임에 비해 상당한 권한을 갖기도 한다. ”

―일을 못하면 징계를 받기도 하나.

“그렇다. 정당한 이유 없이 무단결근을 하면 결근한 날 수의 5배만큼 근무 기간이 늘어난다. 근무 태만 등으로 근무지에서 경고를 받아도 근무 기간이 5일 늘어난다. 경고를 4회 이상 받거나 8일 이상 무단결근을 하면 형사처벌(3년 이하 징역) 대상이 된다. 실형 기간이 1년 6개월 미만이면 형을 살고 난 뒤에도 다시 공익요원으로 돌아와 남은 기간을 근무해야 한다.”

―근무 기간 중에 전쟁이 나면 이들은 뭘 하나.

“현역병으로 신분이 바뀐다. 그러나 직접 전투에 참가하지는 않고 주로 군사 업무를 돕는 일을 하는 것으로 규정돼 있다.”

―공익요원은 군인보다 월급을 더 많이 받는다는데….

“기본급은 현역병과 같다. 근무 기간에 따라 1만7400∼2만1900원의 월급을 받는다. 이 밖에 이들에게는 매월 12만원가량의 교통비와 급식비가 지급된다. 군인과 달리 식사가 제공되지 않고, 또 출퇴근해야 하기 때문이다. 월급을 포함한 모든 돈은 이들이 배치돼서 일하는 각 기관에서 준다.”

―출퇴근하면 시간이 많이 남을 것 같은데 그 시간을 이용해 아르바이트를 할 수도 있나.

“공익근무 이외의 다른 ‘돈벌이’는 일절 금지된다. 프로야구선수였다가 공익요원이 된 서용빈씨가 올해 경기에 참가하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예비군 훈련은 어떻게 받나.

“현역병 근무를 마친 사람들과 같다. 2001년까지는 이들에게 예비군복이 지급되지 않은 바람에 공익요원들이 자기 돈으로 군복을 사야 했다. 그러나 지난해 1월부터 공익근무요원에게도 전투복, 전투화 등 예비군복이 지급되기 시작했다.

―근무기간은 얼마인가.

“9일 병무청이 군 복무기간을 2개월 단축키로 하는 방안을 입법 예고했다. 이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10월부터 소집되는 공익요원은 근무 기간이 지금보다 2개월씩 줄어든다. 즉 행정요원은 26개월, 국제협력요원은 30개월, 예술·체육요원은 34개월간 근무하게 된다.”

이완배기자 roryrer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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