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1>소설가 최인호

  • 입력 2003년 4월 30일 18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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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 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아버지의 동포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김현승의 ‘아버지의 마음’ 중에서)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우리 모두의 아버지를 되돌아보는 시리즈 ‘나의 아버지’를 시작합니다. 드러내놓고 애정표현을 하진 않지만 속으로는 자식에 대한 한없이 깊은 사랑을 품고 사는 한국의 아버지들을 만나는 ‘나의 아버지’는 수시로 연재됩니다.》

아들 녀석이 고등학교 때였으니까 10여년 전의 일이었다. 어느 날 아들 녀석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신혼 사진. 스무 살도 안된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 사진을 보면 인생의 신비함을 느낀다.(최인호) -사진제공 최인호

“아빠는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아버지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자라나 아버지 훈련을 덜 받아서 어린애 같나봐.”

아버지인 내겐 기분 나쁜 말이지만 아들 녀석의 말은 사실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열 살 때 돌아가셨다. 그때 아버지의 나이는 불과 마흔여덟 살이었다. 지금의 내 나이보다 열 살이나 더 어렸으니 정말 아버지는 상상할 수 없는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들 녀석의 말처럼 나는 아버지의 영향력이나 든든한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자라났으며 또한 모범으로 삼아야 할 아버지를 일찍 잃어버렸으므로 아마도 아버지 훈련을 덜 받고 자라난 미성숙한 아빠인지도 모른다.

아버지에 대한 단면적인 기억 중에 잊혀지지 않는 것은 아버지가 눈물이 많으셨다는 점이다. 변호사로서 변론을 하시면서도 줄줄 눈물을 흘리셨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던 것처럼 아버지는 내 앞에서도 눈물을 자주 흘리셨다. 어렸을 때 아버지와 ‘톰 소여의 모험’이란 영화를 함께 보았는데 그 영화를 보면서 나는 이상한 느낌이 들어 슬쩍 아버지의 얼굴을 훔쳐보았더니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고 계셨던 것이었다. 도대체 어린이를 상대로 한 아동영화에서 무슨 장면이 아빠를 울렸을까. 나는 지금도 그것이 궁금하다.

또 아버지는 집에 돌아오실 때마다 내게 안마를 해달라고 하셨다. 형제 중 내가 제일 솜씨가 좋았던지 나보고만 다리를 주먹으로 때려 달라고 하셨는데 그럴 때면 아버지는 내게 조건을 내걸었다. 즉 500번을 때릴 때마다 지금 돈 1000원 정도의 용돈을 준다는 내용이었다. 돌아가실 때까지 나는 안마로 몇 만원의 용돈을 벌어두었는데 아버지는 치사하게도 그 돈을 갚지 않고 돌아가셨다.

언젠가 내가 죽어 저세상에 가면 반드시 아버지에게서 그 밀린 용돈을 받아낼 것이다.

돌아가실 무렵 어느 날 아버지는 병상 옆에서 철없이 놀고 있던 내게 이렇게 헛소리를 하셨다.

“인호야, 사닥다리에서 내려오너라. 위험해.”

그러나 무엇보다 내게 준 아버지의 유산은 무신론자였던 아버지께서 동기생이던 김홍섭 판사의 청을 받아들여 돌아가실 무렵 병자성사를 받고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았다는 점이다. 내가 베드로로 세례명을 정했던 것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베드로2세로 신앙을 이어가기 위함이었다.

그것이 아버지가 내게 준 ‘위대한 유산’이었으니. 아버지, 아버지가 하셨던 그 말씀 그대로 내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사닥다리에 올라가 위험할 때 항상 나를 지켜 보살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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