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진(出陣) 날을 잡은 뒤로 항량은 내리 사흘 밤을 손씨녀와 잠자리를 함께 했다. 쉰을 넘긴 나이뿐만 아니라 평소의 절제와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특히 오중을 떠나기 전날 밤은 거의 뜬눈으로 지새면서 그녀의 몸에 탐닉했는데, 그 새벽에 한 일은 더 별났다. 창틀이 희부윰하게 밝아올 무렵 항량이 그녀의 벗은 몸을 가만히 밀며 불쑥 말했다.
“저기 문 곁으로 가 서거라.”
말수가 적고 초나라 사람 같지 않게 감정 표현에 인색한 항량에게 익숙해있는 손씨녀는 말없이 시키는 대로 했다. 깁을 바른 문살 사이로 새어든 새벽 어스름에 그녀의 벗은 몸이 하얗게 빛나 보였다. 이부자리에서 몸을 반쯤 일으켜 베개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항량은 어둠 속에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강남은 늦은 봄이고, 방안이라고는 하지만 첫새벽의 문가는 아직 싸늘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으로 문가에 서있게 되자 손씨녀는 곧 추위로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항량은 무슨 생각에 잠겨서인지 그녀가 알아보게 몸을 떨 때까지 그녀의 벗은 몸을 바라보고 있다가 가볍게 이빨 부딪는 소리를 듣고서야 무엇에서 퍼뜩 깨난 사람처럼 말했다.
“됐다. 이만 이리 오너라.”
그리고 밝아오는 동녘 때문에 방안이 환해질 때까지 또 한바탕 불같은 정사를 벌였다. 이윽고 집안이 모두 깨어나 수런거리고 항량도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을 무렵, 어느새 옷을 갖춰 입은 손씨녀가 말끄러미 항량을 바라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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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떠나시는…겁니까?”
삼가고 두려워하면서도 걱정을 이기지 못해 애처로운 빛까지 떠도는 눈빛이었다.
“그렇다”
항량이 그렇게 대답하고는 그제야 생각난 게 있다는 듯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가 방안의 궤짝을 뒤적여 꺼낸 것은 작지만 묵직해 뵈는 비단 주머니였다,
“이걸 거두어 두어라.”
“이게 무엇입니까?”
“지금(地金) 몇 덩이다. 너를 위해 마련했다.”
“재물은 나리께서 지금까지 제게 베푸신 것으로 넉넉합니다. 이제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건너시면 그들을 먹이고 입힐 곡식과 돈이 한층 더 필요할 터, 적지만 거기 보태 쓰십시오.”
“너는 또 내가 허락하지 않은 것까지 헤아리는구나. 입을 다물고 거두어 두어라”
항량이 평소와 다름없는 엄한 눈길로 손씨녀를 쏘아보며 꾸짖듯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무엇 때문인지 이내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듯 덧붙였다.
“오늘 내가 군사들과 오중을 떠나거든 너도 이 집을 떠나거라. 되도록 멀리 떠나 네가 나의 사람이었음을 아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서 숨어살아라. 그러다가 뒷날 내가 진나라를 쳐 없애고 함양(咸陽) 성안 대궐에 높이 되어 앉았다는 소문이 들리면 그때는 나를 찾아와도 좋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너와 나는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만약 그때가 끝내 오지 않는다면 너와 나도 이 세상에서 만난 적조차 없는 사람이 된다. 알아들었느냐?”
“나리. 그 무슨 말씀이지요. 사람의 정을 어찌….”
항량에게 어지간히 단련된 손씨녀였지만 거기까지 가자 더는 참지 못했다. 솟는 눈물을 훔치며 울먹이듯 말했다. 항량이 다시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
“내 이런 구차함이 싫어 계집에게 곁을 주지 않았던 터, 네 끝내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겠느냐? 만약 내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으면 이는 곧 포악한 진나라가 다시 천하를 다스린다는 뜻이다. 또한 그때 나는 진나라에 거역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죽은 대역죄인이니 그 가솔(家率)이 어찌 성하기를 바라겠느냐? 답답한 것.”
항량은 그렇게 내뱉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매몰차게 정을 끊듯, 뒤 한번 돌아보는 법 없이 바깥채로 나와버렸다.
까닭 모를 비장감에 빠져있는 항량에 비해 바깥뜰에서 기다리고 있는 항우는 그 어느 때보다 밝고 생기에 차 있었다. 항우가 높이 타고 있는 검은 털 섞인 부루말[백마]이 유별나게 눈에 띄어 항량이 물어보았다.
“안보이던 말이구나. 어디서 난 것이냐?”
“여기서 멀지 않은 용연촌(龍淵村)에서 얻었습니다. 검은 용이 변한 놈을 어제 오늘 제가 길들인 것입니다.”
항우가 기쁨을 감추지 못해 싱글거리며 그렇게 대답했다. 그런 그의 허리에는 며칠 전에 얻었다는 보검이 메어져 있었다. 매사를 차분히 따져 허황된 걸 잘 믿지 않는 항량이 가볍게 이맛살을 찌푸리며 되뇌었다.
“검은 용이 변한 놈을 길들였다?”
그러자 항우가 자랑스레 말했다.
어제 낮 군마(軍馬)를 거두러 나갔던 주무가 용연촌에 이상한 말 한 마리가 있다고 일러주었습니다. 그 마을에는 옛부터 용이 산다 하여 용연(龍淵)이라 불리는 큰 못이 있는데, 며칠 전 그 못에서 한 마리 검은 용이 솟아오르더니 말로 변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너무 빠르고 힘이 세 붙잡을 수가 없고, 용케 붙잡아도 너무 사나워 사람이 타게 길들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급히 용연 가로 가보았더니 정말로 이 놈이 울부짖으며 뛰어다니고 있지 않겠습니까? 나를 떠보듯 내닫는 놈을 한달음에 뒤쫓아 안장 없이 올라탄 뒤, 갈기를 고삐처럼 휘감아 쥐고 무릎으로 놈의 등판을 조인 체 못을 한 바퀴를 돌았더니 이내 순해졌습니다. 그래서 고삐와 박차를 달고 안장을 얹어 다시 길들여 보았는데 하루 만에 벌써 오래된 군마처럼 말을 잘 듣습니다.”
그 같은 항우의 말에 항량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싸움터에서 달아나 산 속을 떠돌다 야생화(野生化)한 군마겠지. 어느 날 갑자기 못 가의 풀밭에 나타나 풀을 뜯자 그 마을 사람들이 잡아다 부리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날래고 사나워 잡을 수 없자 마을의 오래된 전설과 결합돼 용마(龍馬)로 소문나게 되었으리라. 그러다가 결국 너의 날램과 힘에 굴복한 것이겠지. 하지만 네가 며칠 전에 얻었다는 그 보검처럼 용마의 전설도 나쁠 건 없다. 그게 정말로 간장검이든 아니든, 거기에 실린 초나라 회복의 염원만으로 그 칼은 존중되어 마땅한 보검이 되었다. 이 용마의 전설도 마찬가지- 이 말이 용마라면 이 말을 타고있는 너도 은연중에 하늘이 불러낸 사람으로 보여지게 될 것이다. 장수 나자 용마 난다 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겉으로는 기꺼운 듯 감탄했다.
“참으로 용마답구나. 검은 용이 변한 것이라 검은 부루말이 된 것이냐?”
“아닙니다. 섞인 털은 얼른 보면 검지만 실은 푸릅니다. 푸른 부루말[추=청색 잡털이 섞인 백마]이지요.”
항우가 그렇게 받다가 문득 고쳐 말했다.
“하지만 작은 아버님께서 검게 보셨다니, 이름은 오추(烏추)로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흐음. 오추라, 오추마(烏추馬)라. 오(烏)가 검은 용을 떠올리게 하니 그것도 괜찮은 이름이다. 이름뿐만 아니라 힘과 날래기도 하루 천리를 달리는 명마이기를 빈다.”
그때 곁에 와 있던 계포가 새삼 항우를 향해 두 손까지 모으며 집안이 떠들썩할 만큼 크게 소리쳤다.
“아무래도 하늘이 장군을 크게 쓰실 뜻인 듯 합니다. 일전에는 몇백 년 전설만으로 떠돌던 보검 간장(干將)을 찾아 내려주시더니 어제는 또 용마 오추까지 보내셨군요. 진심으로 경하 드립니다!”
항우에게라기보다는 집 안팎 모든 사람이 들으라고 외고 있는 듯했다. 실제에 있어서도 그 외침의 효과는 컸다. 그때 집안에 있다가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항우가 얻은 보검과 명마를 신기하게 여겼다. 저희끼리 수군거리다가 바깥으로 전해진 그들의 말은 곧 오중 성안에 널리 퍼졌다. 그리하여 그 보검을 차고 그 말을 탄 항우를 전보다 더 우뚝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따르는 장졸들의 사기까지 높여주었다.
‘장초(張楚) 상주국(上柱國)’ 깃발을 앞세운 항량과 그 부장(副將) 항우가 2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오중을 떠난 것은 그날 오시(午時)였다. 항량은 먼저 군기(軍旗)에 희생을 바쳐 제사를 올린 뒤에 미리 정해둔 차례대로 군사들을 출발시켰다. 먼저 성을 나선 것은 항우가 이끄는 강동병 8천이었다.
여느 강남사람들처럼 체격이 왜소한데다 용모도 그저 단아할 뿐인 항량에 비해 강동병 8천을 이끌고 앞장 서 성을 나가는 항우의 모습은 실로 볼만했다. 여덟 자가 넘는 큰 키에 우람한 몸피는 번쩍이는 갑옷과 투구로 더 눈부셨다. 거기다가 허리에는 전설로만 전해오던 보검을 차고 용마(龍馬)란 소문으로 더 덩실해 뵈는 오추마(烏추馬) 위에 올라앉아 있으니 마치 푸른 기운 도는 구름을 탄 신장(神將)같았다. 그 안장에 꽂힌 60근 짜리 철극(鐵戟)과 시위를 당기는데 석 섬 무게의 힘이 드는 강궁(强弓)도 항우의 위용을 더했다.
그를 따르는 8천 강동병도 그 시절의 다른 봉기군(蜂起軍)과 아주 달랐다. 옛 초나라의 양가(良家) 자제들만 가려 뽑아 하나같이 젊고 날랜데다 다섯 달이 넘는 엄한 조련으로 한창 때의 진(秦)나라 군사 못지 않게 기세가 날카로웠다. 거기다가 병기와 갑옷에 의장(儀仗)까지 갖춰 위엄과 화려함을 아울러 뽐내니, 항량이 이끄는 군대의 주력이자 그 꽃이라 할만했다. 그들이 형제자매의 환송을 받으며 성문을 나갈 때는 회계군의 속살과 알맹이가 다 빠져나가는 듯했다.
그들 뒤를 겨우 농기구나 면한 병장기를 든 유민(流民)들이 흉갑(胸甲)조차 걸치지 못한 체 대오를 지어 따라갔다. 받드는 대의(大義)도 절실한 성취욕도 없이, 그저 굶어죽지 않기 위해 따라나선 군렬(軍列)이었다. 하지만 그들도 8천 강동병이 앞서고 용저(龍且)나 종리매(鍾離매)같이 용맹한 장수들이 곁에서 휘몰아 또한 그 시절의 흔해빠진 유민군(流民軍)과는 달랐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거센 탁류처럼 오중 성문을 흘러나가 세상으로 덮쳐갔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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