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학]'극단의 생명'…"너희가 미생물을 아느냐"

  • 입력 2003년 5월 2일 17시 09분


◇극단의 생명/존 포스트게이트 지음 박형욱 옮김/408쪽 1만5000원 코기토

국내 첫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환자가 발생했다는 뉴스가 온 나라를 긴장시킨 것도 잠시. 최초의 사스 환자로 알려졌던 사람은 사스를 일으키는 ‘코로나 바이러스’ 가 아니라 세균에 감염됐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바이러스나 세균이나 그게 그거 아닌가?”

천만에! 바이러스(virus)는 세균(bacterium)과 확연히 다르다. 세균과 달리 바이러스는 다른 생물의 체내에서만 활동과 증식을 하며, 그 밖의 장소에서는 무생물에 가까워서, 명확히 구분할 수도 없다.

세균의 구조물 스트로마톨라이트
‘가장 오래된 화석’으로 불리는 스트로마톨라이트는 38억년 전 출현한 세균에 의해 만들어진 구조물이다. 오스트리아 서부에서 발견된 거대한 스트로마톨라이트. ‘사이언스북’(사이언스북스 펴냄·2002) 중에서.사진제공 사이언스북스

생물학의 기초적 상식에 속하는 이런 사실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낯설다. ‘실례’가 아닐 수 없다. 생명의 역사 35억년 중 25억년 동안 모든 생명은 ‘미생물’로 맥을 이어왔기 때문이다.

내친 김에 마저 털어놓자면, 우리가 그들에게 시선을 집중하는 것은 ‘사스’처럼 이들이 말썽을 일으켰을 때다. 어디에나 널린 이 조그만 친구들에게 좋은 감정이 생길 리 없다. 그러나 이들의 도움 없이 우리는 잠시도 살 수 없다.

그 얘기는 잠시 뒤로 돌리도록 하자. 왜 제목이 ‘극단의 생명’ 인가.

미생물의 입장에서 볼 때, 우리 다세포생물은 지구라는 척박한 토양 위의 한정된 오아시스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연약한 존재다. 온갖 열악한 환경을 개척하는 ‘프런티어’의 사명은 세포 하나짜리 미생물들이 떠맡는다. 이 책은 인내와 갖가지 임기응변으로 가혹한 환경을 이겨온 작은 존재들의 ‘성공담’을 담고 있다.

뜨거움을 이긴 챔피언은 심해 화산지대의 열수구(熱水口) 부근에서 112도의 고열을 견뎌내는 메타노피루스다. ‘고등’ 생물의 경우 48도를 넘어서면 세포 속의 단백질이 변하고 세포막이 녹아내린다. 75도에서는 유전자의 DNA나선이 풀어진다. 메타노피루스는 DNA나선을 묶는 특수한 단백질로 문제를 해결한다.

추위를 이긴 챔피언은 남극의 염호(鹽湖)에서 영하 12도까지 견디며 사는 내냉성(耐冷性)세균이다. 이들도 세포 속의 물이 얼면 세포벽이 터져 죽어버리지만, 대신 터진 세포벽에서 ‘부동액’을 쏟아내 주변의 동료들을 보호한다.

어떤 미생물은 스스로 가혹한 화학적 환경을 만든다. 티오바실러스의 어떤 종은 강산성(强酸性)의 챔피언이어서 하수도관 속에서 pH1의 산성을 만들어낸다. 아연이 부글부글 녹아버릴 정도다. 이들은 세포벽을 이용해 몸속의 수소이온농도를 1만배나 차이 나게 조절한다. 이런 ‘화학적 가혹함’은 적의 침입을 방지하는 무기도 된다.

분야별 챔피언의 면면을 살펴보았으니 ‘공로상’으로 시선을 옮겨보자. ‘무산소성’ 세균은 산소호흡 대신 죽은 유기물을 쪼개 에너지를 얻는다. 이들의 정화능력이 없다면 지구는 재활용이 정지돼 쓰레기장으로 변하고 만다. 이들이 없다면 된장도, 빵도, 술도 없다. ‘뿌리혹 박테리아’ 등 질소고정생물은 단백질을 만드는 질소화합물을 생명계에 꾸준히 공급하고 있다.

소화기관 속의 몇몇 미생물은 자연물에서 얻거나 인체가 합성할 수 없는 필수비타민을 합성해준다. 소화관의 미생물은 소나 양에게 더 중요하다. 초식동물이 실제로 먹는 것은 위 속에서 미생물이 풀을 분해해 생긴 낙산(酪酸)과 죽은 ‘분해자’의 잔해들이다.

더욱 중요한 것, 미생물은 우리 자신의 일부이자 ‘주주(株主)’이기도 하다. 세포 속의 소기관 ‘미토콘드리아’는 먼 옛날 우리 조상의 몸속에 침입한 뒤 공생관계로 발전한 미생물이다.

저자의 시선은 책 말미에 이르러 현미경에서 천체망원경으로 옮겨진다. 미생물 표본 속에 인류의 미래가 보이기 때문이다. 활용할 수 있는 자원과 공간이 한정되어 있을 경우 미생물들은 과도하게 밀집된 뒤 독성물질이 빠져나가지 못해 성장이 중지된다. 저자는 ‘지구’라는 표본 위의 인류가 이 같은 과정을 겪고 있다고 말한다. 해소방법은? 미생물들이 그렇게 하듯, 새로운 환경에의 적응이다.

저자는 인류가 이제 지구 밖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행성의 가혹한 조건도 미생물이라면 헤쳐 나갈 수 있을지 모른다. 우리가 바로 적응할 수 없는 곳에 미생물을 ‘선발대’로 보내 바람직한 환경을 조성할 수 있다.

“이런 생각들은 이제 SF의 주제가 아니다. 우주에 밀폐된 주거지를 만드는 일은 엄청난 비용과 에너지를 소비하지만, 약간의 물과 대기가 있는 곳에 밀폐되지 않은 식민지를 건설하는 일은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지 않는다. 이는 미생물이 그래왔듯이, 생명체가 세계를 자신에게 맞게 변화시키고 자신의 영역을 확장시킨 훌륭한 예가 될 것이다.”

▼바이러스란? ▼

유전물질인 핵산과 극히 적은 단백질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밖의 모든 것을 숙주세포에 의존해 살아가는 미생물. 인체 내에서 에이즈 뇌염 간염 홍역 결막염 등 다양한 질병을 일으킨다. 숙주의 체외에서는 생명의 특징이 없고, 정제하면 결정을 이루기도 하지만 증식과 유전의 성질을 가지므로 생명체로 간주된다. 구조가 단순해 세균의 단백질 합성을 방해하는 항생제로는 퇴치가 힘들며, 동물 체내의 항바이러스 물질인 인터페론 등이 효과를 보인다. 최근 문제가 된 사스 바이러스는 독감 바이러스인 코로나 바이러스의 변종으로 알려졌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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