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측은 유물이 혹시 도굴된 것은 아닌지 영국 런던에 있는 ‘아트 로스 레지스터’(www.artloss.com)에 확인을 요청했다. 아트 로스 레지스터는 전 세계에서 도난당하거나 도굴당한 미술품과 유물 10만여점에 대한 자료를 보유하고 있는 민간기구.
아트 로스 레지스터는 이 구리상이 1991년 걸프전 당시 이라크 북동부 키르쿠크 지역 박물관에서 약탈된 유물임을 확인했다. 이라크 남부 알 히바 지역의 이나나 여신 사원 유적에서 발굴된 이 상은 약 4500년 전 것으로 ‘근본 손톱(foundation nail)’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크리스티측은 이 유물을 세관으로 돌려보냈다. 어떤 과정을 거쳐 이 유물이 크리스티까지 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근본 손톱’은 걸프전 당시 이라크 지역 박물관 9곳에서 사라진 2000여점의 유물 가운데 최근까지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유물 10여점 중 하나다. 나머지 유물의 행방은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후세인 정권이 무너진 지난달 10일부터 사흘간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의 국립박물관이 약탈당했다. 인류 4대 문명의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유물 17만여점 중 상당수가 사라졌다. 일부 유물은 시민들이 반환을 했거나 서방 언론사 직원들이 갖고 국경을 넘으려다 들켜 반환됐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어디로 갔을까?
● 어디에 있나
바그다드 국립박물관에서 어떤 유물이 얼마나 사라졌는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미군 조사단은 메이저급 유물 27점을 비롯해 100여점이 사라졌다고 발표했다. 최근 바그다드 박물관을 방문한 존 커티스 대영 박물관 중동 담당 국장은 6일 “전시실에 있던 유물들은 안전한 곳으로 옮겨졌지만 창고에 보관 중이던 수천 점의 유물은 약탈당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커티스 국장 역시 안전지대로 옮겨진 것까지를 포함해 사라진 유물의 정확한 목록을 모른다.
전문가들은 사라진 유물 대다수가 국제적 유물 암시장에서 거래돼 개인 수집가의 손에 들어갈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91년 유엔의 이라크에 대한 경제 제재가 시작된 이래 이라크에서 출토된 유물의 국제적 거래는 금지돼 있다. 그러나 많은 고대 이라크 지역 유물이 90년대에 암시장과 합법적 시장에 대량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약탈된 유물들은 일단 이라크 국경을 넘어야 한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허권 문화부장은 “이미 많은 유물이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로 갔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물 대다수는 이라크와 국경을 맞댄 국가 중 하나인 요르단 수도 암만으로 건너갔을 가능성이 높다.
암만에는 유물이 전문적으로 거래되는 시장과 유명한 중개상들이 있고 걸프전 이후 이라크에서 밀반출된 유물의 상당수가 이곳에서 거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요르단을 비롯해 이라크 접경 국가인 시리아 터키 등 국경 경비가 다소 허술한 곳으로도 많이 넘어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중개상에게 넘겨진 유물은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서구 유럽과 미국 일본으로 이동할 확률이 높다. 최근 미 경제전문 주간지 ‘비즈니스 위크’는 전문가들의 분석을 인용해 “유물은 박물관에서 붙여 놓은 아이디 번호가 지워진 채 전혀 다른 물건처럼 국제적 딜러들에게 항공편으로 운송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전문가들은 특히 많은 유물이 스위스를 거칠 것으로 보고 있다. 스위스의 문화재 관련법이 유물의 구매자에게 매우 호의적이기 때문이다.
미 매사추세츠 예술대학의 역사 및 고고학 교수인 존 러셀은 “스위스에서는 구매자가 도굴된 유물을 사고 5년 동안 소장한 뒤 사실이 드러나도 훔친 물건인 줄 몰랐다고 주장하면 계속 유물을 소유할 수 있다”고 LA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설명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시장은 미국과 영국이다. 유네스코는 전 세계 유물 암시장에서 거래되는 유물이 연간 50억달러(약 6조원)대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미 연방수사국(FBI)은 최근 “불법 거래를 포함한 전체 유물의 60%가 미국에서 거래된다”고 발표했다.
또한 세계적인 골동품상이 밀집한 영국 런던에서도 불법 거래가 활발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말이다. 영국 자유민주당 리처드 알란 의원은 최근 “런던이 약탈된 유물을 팔려는 사람들의 허브가 됐다”며 약탈된 이라크 유물이 런던에서 거래될 가능성을 경고했다.
● 누가 했을까
바그다드 국립박물관 관장 대행 도니 조르주는 지난달 29일 런던에서 열린 국제 박물관 담당자 회의에서 “이번 약탈은 돈을 노린 전문적인 사람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약탈자들은 메이저급 유적이 무엇이고 어디 있는지 잘 알고 있었으며 이들이 보관된 지하 금고의 열쇠와 유리를 자르는 칼도 가지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번 약탈은 범죄 집단이 박물관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이라크인들을 사주해 저지른 일이라고 주장한다.
인터폴에 따르면 유물을 포함한 미술품은 마약과 무기에 이어 국제 암시장에서 세 번째로 거래규모가 큰 품목이다. 국제박물관협회(ICOM)는 90년대 후반부터 마약을 밀거래하는 범죄 집단이 유물들도 불법 거래한다는 보고가 잇따르고 있다는 자료를 최근 발표했다.
이런 범죄 집단이 유물을 거래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이윤이 엄청나기 때문이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맥도널드 고고학 연구학회에서 고고학자 짐 브로디 등이 2000년 펴낸 ‘역사 훔치기’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유물이 불법 거래될 때 최종 가격의 98%가 중간상의 몫이었다.
이에 따르면 하수인 노릇을 한 이라크인들은 1만달러(약 1200만원)에 거래될 유물을 훔쳐서 200달러(약 24만원) 남짓한 돈을 받는다. 물론 지난해 이라크 국립박물관 직원의 평균 임금이 월 18달러(약 2만원)였음을 감안하면 큰 돈이다.
두 번째 이유는 유물들이 ‘돈세탁’에 아주 유용하기 때문이다. 범죄 집단은 마약 등의 불법 거래로 거둬들인 현금으로 유물을 구입한 뒤 출처를 조작해 경매시장에 내놓는다. 경매시장에서 유물이 팔리면 이들은 수준 높게 돈을 세탁할 수 있다.
사담 후세인 전 대통령이나 측근들의 소행일 가능성을 제시하는 전문가도 있다.
영국의 예술 전문지 ‘아트 뉴스페이퍼’의 미국 수석 특파원 제이슨 카우프먼은 “박물관 약탈 직전에 후세인이 미리 메이저급 유물들을 모처에 보관해 놓았다는 이야기가 돌았다”고 말했다. 이는 지하 금고가 열쇠로 열려 있었고 모조품은 손도 대지 않았다는 사실이 뒷받침한다는 것.
걸프전 전후에 약탈 또는 도굴된 유물들이 90년대 밀거래 될 때 수집가나 딜러들 사이에는 후세인 대통령의 아들 우다이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후세인의 사위인 카멜 마지드의 보디가드가 주요 유물들을 밀거래했다고도 알려졌다. 후세인 정부(情婦)의 동생이었던 그는 국경을 오갈 때 세관의 검사를 받지 않는 외교 행낭을 유물 밀반출에 이용했다고 전해진다.
● 언제 어떻게 처리될까
이번에 약탈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 가운데는 기원전 3200년경의 설화석고로 된 1m 높이의 단지, 기원전 2500년경 메스칼람둑 왕의 황금투구, 기원전 3200년경 수메르 여인의 실제 얼굴 모형인 와르카 헤드 등이 포함돼 있다.
이런 유물들은 너무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거래될 가능성은 거의 전무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중동 문명 전문가인 권삼윤씨는 “이런 유물들은 최소한 한 세대, 최대 한 세기가 지나야 공개적인 자리에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밖의 덜 알려진 유물들은 암시장을 거쳐 이라크 유물에 대한 세계 여론이 잠잠해질 때를 기다린 뒤 경매시장이나 골동품상에 나올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유물들은 출처가 분명하고 소유주들에 대한 기록이 명확해야만 공개적인 시장에서 거래될 것으로 생각하지만 관행이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짐 브로디 등의 보고서 ‘역사 훔치기’에 따르면 80년대부터 2000년까지 런던 경매시장에서 거래된 유물들의 65∼90%가 공식적인 출처 기록이 없었다. 심지어는 영국의 유명 경매 전문 회사인 소더비에서 거래된 것도 마찬가지였다.
이 사실은 소더비의 직원이었던 제임스 호지스가 91년 내부 자료를 영국의 칼럼니스트인 피터 왓슨에게 제보해 외부에 알려지게 됐다. 이 자료에 따르면 소더비는 10년이 넘도록 이탈리아, 영국, 인도 등지에서 반출이 금지된 유물을 경매에 내놓았다.
출처나 소유주 기록의 조작도 가능하다.
미국 뉴욕의 유명한 유물 딜러이자 수집가인 프레데릭 슐츠는 지난해 약탈된 이집트 유물을 밀반입해 판매한 혐의로 기소돼 징역 33∼41개월에 벌금 5만달러(약 6000만원) 형을 받았다. 그는 밀반입된 유물의 출처와 기원을 조작한 증명서를 오래된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녹차에 담갔다가 오븐에 굽기도 했다.
게다가 이번 경우처럼 박물관의 유물 카탈로그가 소실돼 어떤 유물이 사라졌는지 재정리하는 데 시간이 최소한 6개월 이상 걸리는 경우라면 조작은 더 쉬워진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허권 부장은 “유물에 대한 출처를 확인할 방법이 없어지면 그만큼 구매자를 속이기 쉬워진다”며 “이번에 약탈된 이라크 유물들도 카탈로그가 재정리되기 전에 공개적으로 거래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민동용기자 mindy@donga.com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